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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별 볼 일 있는 날] 우리 아버지가 거기 서 있었네 … 이성민

중앙일보 2014.11.19 00:32 종합 16면 지면보기


장안의 화제란 건 이런 때 쓰는 말이다. 시청률은 5~6%대지만 그건 유료방송의 한계일 뿐, 체감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요즘 직장인들이 모인 곳에서는 빠지지 않고 화제에 오른다. 바로 내 얘기라며 무릎을 친다. 원작 웹툰에서 드라마의 인기까지 사회 신드롬으로도 읽힌다. tvN 금토 드라마 ‘미생’ 얘기다. 종영까지 20회 전편의 광고가 완판됐다. 이재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머릿수 시청률에서 버즈(화제) 시청률로 개념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라고 평했다.



 내용은 잘 알려진 바다. 바둑 청년 장그래(임시완)가 원인터내셔널이라는 종합상사에 인턴을 거쳐 계약직으로 입사하면서 시작된다. 무대만 회사일뿐 한가로운 연애담에 몰두하는 대신, 전쟁 같은 회사 생활의 애환을 생생하게 그려간다. 사내 정치가 난무하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에게, 여자 후배는 남자 선배에게, 상사맨은 고객에게 ‘갑을’의 수모를 당한다. 그래도 결국은 “지금 내 일이 바로 나야”(장그래)라고 받아들이는 드라마다. ‘밥벌이’의 신성함을 말하면서 이 시대의 직장인, 소시민, 가장에게 바치는 헌사다.



 특유의 처연함으로 ‘신의 한 수’ 캐스팅이었다는 평을 받은 임시완을 비롯해 김대명(김대리 역), 강소라(안영이 역) 등의 연기 앙상블이 합격점이다. 그 인기몰이의 핵심에 오상식 과장 역의 이성민(46)이 있다. 관록의 연기파다운 리얼한 연기가, TV드라마가 아니라 여느 직장생활의 한 단면을 뚝 떼어내 보여주는 것 같은 현실감을 준다.



 ◆원작 싱크로율을 넘어서는 존재감=극중 이성민의 첫 등장은 해외출장에서 돌아오자 마자 다음번 계약 현장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이었다. 원작 만화 속 트레이드 마크인 붉게 충혈된 토끼 눈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외적인 유사성을 넘어서 원작보다 더 코믹하고, 더 인간적인 캐릭터를 선보이기도 했다. 피곤함에 찌든 피부, 풀어 헤친 와이셔츠 첫 단추,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딱 일 중독자 그 자체다. 무심하지만 인간적인 온기가 있고, ‘물먹는’ 부서에 있지만 원칙을 좇아 타협하지 않는 면모도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7회의 술 취한 연기는 두고두고 화제였다. 실세 전무(이경영)의 지시로 일을 빼앗긴 그는 정말 더럽다고 느껴질 정도의 만취 연기를 선보였다. 침을 질질 흘리고, 변기에 얼굴을 완전히 처박았다. 한껏 속을 게워내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똑바로 보면서 “당신들이 술 맛을 알아?” 묻는 대목에서는 눌러왔던 억울함과 분노가 느껴졌다. 네티즌들은 “옛날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먹먹하다. 남편이 이렇게 힘들게 직장 생활하는 줄 몰랐다”는 관람평을 달았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상=‘전원일기’의 순박한 한국적 아버지 최불암, 혹은 김정현 소설 ‘아버지’의 희생적인 아버지 이후 최근까지 대중매체 속 아버지들은 아들 세대로부터 줄곧 부정 당해왔다. 심지어 지난해 영화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에서는 어린 아들이 자신을 길러준 5명의 범죄자 아버지를 쏴죽였다. 부도덕한 기성 시스템을 상징하는 (범죄자) 아버지들을 처단하는 아들의 얘기였다.



 그러나 이성민이 연기한 오과장은 모처럼 연민이 느껴진다. 양심의 마지노선을 지키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절로 응원가를 불러주고픈 아버지다. 직장인들에게는 어쨌든 ‘인간적인 일터’가 가능하다는 판타지를 안겨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중년 연기자 전성시대=이성민은 대표적인 늦깎이 배우다. 송강호·유오성·강신일·이희준 등을 배출한 극단 ‘차이무’ 출신. 1992년 대구연극제에서 신인연기자상을 받았다. 무명 시절 한때는 송강호가 어디서든 추천하는 배우로 유명했다. 출세작은 2012년 MBC ‘골든타임’이다. ‘파스타’ ‘브레인’ 등에서 코믹 악역 감초 연기로 주목받은 후였다. 아주대병원 이국종 교수를 모델로 한 의사 최인혁 역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그의 휴대전화엔 대리운전기사 모집처 번호가 입력돼 있던 것으로 알려진다.



 어떤 역할을 해도 인간미가 느껴지고 캐릭터의 입체성이 살아있는 연기가 강점이다. 다작을 하는 편이며, 직장인과도 같은 연기관을 갖고 있다. “연기는 먹고 살아야 하는 하나의 어떤 일이며, 스트레스 받아도 열심히 해야 한다. 연예인이라고 특별한 건 없다. 매일 출근은 안 해도 보통 직장인과 같은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때마침 TV에는 그 말고도 중년 연기자들의 무르익은 연기가 화제다. MBC ‘오만과 편견’의 카리스마 넘치는 부장검사 최민수, OCN ‘나쁜 녀석들’의 열혈 형사 김상중, SBS ‘비밀의 문’ 영조 한석규다. 방송평론가 공희정씨는 “최근 TV 드라마가 꽃미남 일변도에서 벗어나 모처럼 중년 연기자들의 탄탄한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양성희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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