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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또 다른 수출품 디플레이션

중앙일보 2014.11.18 17:42
미국발 금융위기 최악의 순간인 2008년 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새로운 적이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디플레이션(Deflation)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훈련된 요즘 중앙은행가들에겐 낯선 적수”라고 했다. 일본은행(BOJ) 수뇌부는 당시 낯선 적과 14년째 싸우고 있었다. 이 싸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로 20년째다. 지난해 4월 일본은행은 싸움의 규모를 키웠다. 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강력한 카드를 꺼냈다. 무제한 양적 완화(QE)다. 더이상 기준금리를 낮출 수 없게 되자 일본은행은 시중에서 국채를 사 돈을 풀었다. 하지만 물가 상승률은 기대만큼 높아지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미래의 물가 흐름을 가늠하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요즘 불안하다는 점이다. 올 여름 이후 다시 낮아지고 있다. 18일 현재 1.11%에 그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물 경제마저 다시 침체에 빠졌다. '일본 디플레이션 시즌 2’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일본은행이 추가 양적 완화를 단행한 이유다.



일본이 이 지경이 된 데는 디플레이션 초기대응 실패 때문이다. '양적 완화 설계자’로 불리는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스햄프턴대 교수는 “물가하락 조짐이 나타난 1994년 당시 BOJ 총재인 미에노 야스시(三重野康)는 ‘돈을 풀면 부동산 거품이 재발한다’며 통화공급을 늘리지 않았다”며 “이는 인플레이션이나 거품 해결에 익숙한 중앙은행가들이 저지르기 쉬운 판단 착오”라고 말했다.



비슷한 일은 요즘 유럽중앙은행(ECB) 내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IGE) 이사장은 “ECB 내부 의견 충돌 때문에 마리오 드라기 총재의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드라기가 독일 반대 때문에 양적 완화 등을 신속하면서도 과감하게 펴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재정 낭비벽을 고쳐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남유럽 국가들의 경기부양을 봉쇄하고 있다. 동시에 ECB가 양적 완화 등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다. 이런 배경엔 독일이 20년대와 2차대전 직후에 경험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경험이 똬리를 틀고 있다.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8개국) 실물 경제는 나날이 나빠지고 있다. 경기침체가 남유럽에서 독일로 확산하고 있다. 그 바람에 유로존 물가는 올 10월 0.4% 오르는데 그쳤다. 재정위기가 절정이었던 2011년 12월 이후 35개월째 상승률이 낮아지고 있다. 통계 오류를 감안하면 사실상 디플레이션 상태다.



이런 와중에 중국 대륙에서도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공장 출고가(생산자 물가)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2012년 3월 이후 32개월째다. 이른바 ‘생산자 물가 디플레이션’이다. 로이터 통신은 최근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생산자 물가 하락은 중국 자체뿐 아니라 세계적인 불안 요인”이라고 했다. 중국산 생산자 물가 하락이 수출 채널을 통해 유로존과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물가불안을 키울 수 있어서다. 중국의 숨겨진 수출품 하나가 디플레이션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미 조짐은 나타났다. 미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서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이 자리 잡았다”고 진단했다. 디스인플레이션은 디플레이션의 전단계다. 더욱이 모건스탠리는 “한국 등 아시아 10개국에서도 생산자 물가 디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아시아는 중국 못지 않은 수출 주도 경제권이다. 중국발 물가불안이 국제유가 하락과 아시아 생산자 물가 디플레이션에 의해 증폭돼 세계로 확산한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디스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디스인플레이션은 물가가 오르지만 상승 폭이 줄어드는 현상이다. 국내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2011년 8월 4% 정도에서 올 10월 1.2%로 낮아진 게 예다. 반면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장기적으로 떨어지는 걸 말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년 연속 물가가 하락하면 디플레이션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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