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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기자의 '문학현장 가로지르기']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는 몇 개의 시선

중앙일보 2014.11.18 05:00
외국 작가 가운데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65) 만큼 국내 문학 독자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도 없을 듯 싶다. 굳이 입방아라는 표현을 쓴 건 익히 아시겠지만 그의 소설에 대한 문학성 논란이 끊이지 않아서다.



문학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하루키 소설의 문학성을 두고 국내 평단에서 이렇다 할 논쟁이 벌어진 적은 별로 없다. ‘극언’ 수준의 비판을 가하고 있는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선생을 제외하면 대부분 나름의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장단점을 논하는 술자리 뒷공론 식의 의견 교환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참여 문학 진영의 창비, 순수 진영의 문학과지성사 그룹 모두 굳이 외국 작가를, 그것도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돼 장사 잘 하는 출판사들이 있는 마당에 문제의 작가를 도마에 올려 재단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인 것 같다.



국내 출판 시장에서 하루키 소설을 양분하는 문학동네 출판사의 10인 편집위원 중 한 명인 평론가 남진우씨가 그런 ‘하루키 기피증’의 유일한 예외일 듯 싶다. 1999년 평론집 『숲으로 된 성벽』(문학동네)에서 하루키의 영향을 받은 한국 작가들의 이름을 실명 거론하는 ‘실례’를 무릅쓰며 하루키 소설에 대한 본격 평론을 선보인 그는 올해 대산문학상 평론 부분을 수상한 지난해 평론집 『폐허에서 꿈꾸다』(문학동네)에도 하루키 평론 한 꼭지를 실었다. 2009년 국내 출간된 장편 『1Q84』(문학동네)를 분석한 글이다. 한 가지, 99년과 2009년 사이에 남씨가 활동하는 문학동네가 그전까지 하루키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문학사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하루키 책을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남씨의 『1Q84』 분석글도 소설 출간에 맞춰 쓴 것이다. 그러다보니 남씨의 글은 시종 평론가적인 객관성을 견지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하루키에 대한 호의가 느껴지는 대목도 눈에 띈다.



기자는 하루키 소설의 속살, 이른바 문학성 논란의 내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권장할 만한 명작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의 책이 수 십 만, 수 백 만 권이 팔리는 국내 현실은 이미 하나의 문화현상이기 때문이다. 남씨의 평론글들을 훑고 85년에 쓰여져 국내에는 96년에 소개된 하루키 대표작 중 하나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문학사상사)를 가능한 한 검토했다. 활동이 활발해 ‘촉이 좋은’ 평론가들의 의견도 들었다.



워낙 하루키 독자가 많다 보니 하루키 소설의 장단점에 대한 이 글이 어쩌면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하루키 세계를 맛볼 수 있는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그의 최근작을 읽는 것이다.



지난 8월 출간된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문학동네)이다. 책은 9·10월 연속해서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오르며 이름값을 했다. 출판사는 모두 19만 부를 찍었다고 밝혔다. 제작 부수이지 판매 부수는 아니지만 초판 몇 천 부 소화에 바쁜 요즘 보통 소설에 비하면 역시 하루키 다운 규모다. 책에 실린 일곱 편 중 표제작 ‘여자 없는 남자들’을 권하고 싶다(실은 게으른 기자가 일곱 편 중 읽은 유일한 작품이다. 읽으며, 하루키적 특징이 유감 없이 들어 있다고 느꼈다).



이 작품에서 사건은 없다시피 하다. 남자 주인공이 한 밤 중에 오래 전 사귀었던 여성의 남편으로부터 여성의 자살 소식을 전해들은 게 유일한 사건이다. 이 단순한 씨앗을 만개한 읽을 거리로 꾸며내는 하루키의 솜씨는 실로 숙수(熟手)처럼 매끄럽다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서쪽에서 부는 바람(西風), 서풍이 불 때마다 발기하는 14세 소년, 암모나이트와 실러캔스 같은 시원( 始原)을 떠올리게 하는 고대 생물, 여성을 자신으로부터 앗아갔다고 소설의 화자가 추측하는 건장한 체구의 뱃사람들, 그들이 여성을 데려 갔을 마르세이유 같은 이국적인 항구, 남성 고독을 상징하는 듯한 일각수(유니콘·『세계의 끝…』에도 등장하는 동물이다) 등 뭔가 아구가 맞지 않는 듯하면서도 하나의 계열을 이루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기억과 환상의 목록을 뭉뚱그려 제시한다. 최초의 사랑, 한 번 깨지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순수한 상태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경을 나타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에로 코드도 어김 없이 등장한다. 과거 연애 시절 여성이 남성 화자의 성기를 소중하게 손바닥에 얹고 “모양새가 멋있어”라고 칭찬했다고 회상하는 대목. 아련하던 소설의 분위기가 농탕치는 유희적인 것으로 내려 앉는다.



그의 소설 특징으로 거론되곤 하는 무국적 문화 소비 장면도 빠지지 않는다. 여성은 무색무취 편안하게 듣기 좋은 엘리베이터 음악을 사랑했다. 퍼시 페이스, 만토바니, 레몽 르페브르, 프랭크 책스필드, 프랑시스 레, 101스프링스, 폴 모리아, 빌리 본이 그런 음악들이다. 1만 개쯤 엘리베이터 음악 테이프를 갖고 있었고(웬 오타쿠?), ‘죄 없는’ 엘리베이터 음악에 대한 지식도 방대했다. 특히 퍼시 페이스의 ‘A Summer Place’는 섹스할 때 자주 들었던 노래다. 그래서 남성은 록음악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흥분이 된다. 분위기 음악이라는 무국적 자본주의의 문화적 기호 안에서 물방울처럼 떠다니는 개인들의 감정의 공유, 감각의 교환이다. 어쩐지 소설 속 음악목록을 모조리 구해 듣고 싶어진다.



남진우씨는 하루키 소설의 매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99년 평론집에 실린 ‘오르페우스의 귀환’에서다.

“이야기를 재미 있게 풀어나가고 이미지와 상징을 긴밀하게 짜넣는 능력도 출중하지만 하루키는 무엇보다 먼저 탁월한 산문가라고 할 수 있다. 번역이란 해협이 가로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이 내뿜는 신선함과 아름다움은 금방 감지된다. 가벼운 미열과 함께 몸 전체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약기운처럼 그의 문장엔 읽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411쪽)



문장만 따로 떼어내 한 작가의 특장을 논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하루키는 문장도 매력적이라는 얘기다.

하루키 문학에 대한 반론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의 소설의 장점으로 거론되는 특징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어떤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까. 장점을 얻는 과정에서 잃는 것들 혹은 희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 말이다.



문학평론가 정홍수씨는 “하루키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 있다. 나도 『1Q84』를 너무 재미 있게 읽었다”고 했다. 또 “이야기의 리듬감이 굉장히 뛰어난 것 같다. 서사를 풀었다 조였다 하는 장인적인 기질이랄까, 그런 게 뛰어난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단점을 뭘까. 정씨는 “그런데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소설을 읽기 전보다 깊어졌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회를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고, 인간 내면의 실존적인 부분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따지되 그런 내용을 밀도 있는 문장에 담아 내는 이른바 ‘본격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얘기다. 계속해서 정씨의 분석이다.



“90년대 하루키가 국내 소개되기 이전까지 엄숙주의에 갇혀 있던 한국문학에 변화가 온 계기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가 쿤데라가 보여준 테마의 새로움이었다면 또 다른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루키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이 사람의 소설은 일부러 깊이 안 들어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만약 깊이 있는 소설을 추구했다면 지금과 같은 대중성은 가질 수 없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 스스로가 어떤 깊이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문학에서 깊이를 추구하는 자체를 일종의 허세나 하나의 포즈로 생각하는 나름의 확고한 문학관이 있는 것 같다. 소설은 그저 이야기를 통해서 즐거움을 전달하면 되는 거지, 그런 입장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뭔가 재미 있게 읽었는데 남는 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다. 내러티브 요소로 연애나 섹스를 적절하게 집어 넣어 통속적 즐거움을 전달하는 방식도 이른바 정통문학에서는 가급적 피하는 방식 아닌가.”



요컨대 능란한 하루키는 골치 아픈 얘기는 일부러 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다. 어쨌거나 소설이 좀 가볍다는 얘기다.

창비 진영의 평론가 백지연씨는 시선이 좀 달랐다. “전통적인 소설 문법에 견주면 비판받을 부분이 있긴 하지만 과거와는 판이하게 변화하는 문학이 처한 환경을 잘 반영하는 작가”라는 평가다. 각자의 문학적 입장에 따라 내용이 다를 수 밖에 없는 ‘문학성’이라는 광범위한 잣대를 거칠게 들이대 대중적이긴 하지만 문학성이 떨어지는 작가라고 손쉽게 재단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백씨는 “소비자본주의 현실 속의 연약한 개인들이 서로 공감과 유대를 주고받는 방식이 어떤 문화적 기제를 띠고 다가오는 것, 소설의 배경 도시가 미국이어도 아니면 세계 어디에도 상관 없다는 것, 지역이나 국가에 얽매이지 않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개인 등 하루키 소설 속의 현실은 실제로 마시고 소비하며 삶을 영위하고 역사를 직접 대면하지 않는 개인들에게는 무엇보다 구체적인 현실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하루키가 90년대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지만 나름 현실을 반영하는 개성 있는 작가로서 안정적으로 읽히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실 하루키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다. 그만큼 그는 어떤 면에서 뜨겁다. 갑작스러운지 모르겠지만 슬슬 마무리 짓자. 거친 결론일 수 있겠으나 다음과 같이 하루키를 요약해도 될 것 같다. ‘우선 재미 있는 작가. 가볍지만 그렇다고 단순하지는 않은 작가.’

평론가 유종호 선생의 반응이 재미 있다. 하루키에 대한 선생의 가혹한 비판은 그가 2011년 펴낸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에 실은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에 부쳐’에 나온다. 하루키의 출세작 『상실의 시대』(문학사상사)에 대한 평이 특히 자극적이고 비판 수위도 가장 높다.



“요컨대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다. 학생운동의 타락한 이면을 적어놓고 급진파 학생들의 모순된 언행을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볼거리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은 작자의 상업적 재능을 드러내준다.” (113쪽)



유 선생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하루키에 대한 내 평가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잘 하면 그 사람 노벨상 탈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13만 부를 찍는 미국의 권위 있는 서평 잡지 ‘뉴욕 리뷰 오브 북스’가 최근에도 하루키 작품에 대한 리뷰를 했다는 게 근거다. 국내 찬반 양론을 떠나, 평범한 독자도 빤히 지적할 수 있는 하루키 소설의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이미 글로벌하게 읽히고 비평의 관심을 받는 텍스트라는 얘기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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