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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잡지 『유심』의 초대장

중앙일보 2014.11.18 00:10 종합 32면 지면보기
문태준
시인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18년 9월 1일자로 『유심(惟心)』을 창간했다. 근대적인 글쓰기를 실험한 이 잡지는 불교 수양지 혹은 종합 교양지로서의 색채를 함께 보였다. 편집 겸 발행인이 한용운 선생으로 되어 있고, 발행소는 서울 계동 43번지로 되어 있다. 한용운 선생이 직접 쓴 창간사 ‘처음에 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보느냐. 샛별 같은 너의 눈으로 천만(千萬)의 장애(障碍)를 타파하고 대양(大洋)에 도착하는 득의(得意)의 파(波)를. 보이리라 우주의 신비(神秘). 들리리라 만유(萬有)의 묘음(妙音). 가자 가자, 사막도 아닌 빙해(氷海)도 아닌 우리의 고원(故園), 아니 가면 뉘라서 보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매화(梅花).” 그러나 이 잡지는 1918년 12월 통권 3호를 끝으로 아쉽게도 종간했다.



 그런데 1918년 12월에 종간된 『유심』은 83년 만인 2001년 봄에 다시 복간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시 전문 월간지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복간 과정에는 잘 알려진 대로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의 노력이 있었다.



 최근 『유심』 편집실에서 초대장이 왔다. 2009년 7월부터 격월로 우리 시문학의 대표적인 시인과 평론가를 초청해 그 문학적 삶과 창작의 뒷얘기를 청취해온 ‘문학토크’가 어언 30회를 맞이함에 따라 “그동안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신 초청 시인과 평론가를 한자리에 모시고 기념과 감사의 뜻을 담은 저녁만찬 모임을 갖고자”한다는 것이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각종 문학상 시상식 초대장이나 출판사의 송년회 초대장이 배달되어 오고 있지만, 『유심』의 초대장은 그러한 초대장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잡지를 성원해준 문단의 어른들을 정중하게 초대한다”고 밝힌 대목이 특히 그러했다.



 문단 어른들에 대한 이 잡지의 깍듯한 관심과 배려는 지난달의 특집란 ‘원로시인의 안부를 묻다’에서도 잘 드러났다. 편집 후기에는 이러한 글이 실렸다. “시단에는 만 80세(1934년생)가 넘는 원로시인이 여러 분이다.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안부도 물을 겸 원고청탁을 했더니 황금찬, 정완영, 김종길, 김남조, 김교한, 문덕수, 장순하, 박희진, 최승범, 강민, 신현득, 김후란, 민영 선생 등 13분이 신작과 근황을 보내오셨다. 그러나 홍윤숙, 김광림 선생은 원고를 보내줄 형편이 아니라 했다. 허만하 선생은 12월호 신작을 주기로 약속했다. 노시인들의 건강을 축원드린다.”



 특집란은 감명 깊었다. 김종길 시인은 신작시 ‘황락(黃落)’을 발표했다. 시의 일부는 이러했다. “내 뜰엔 눈 내리고/ 얼음이 얼어도, 다시/ 봄은 오련만//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 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 봄도 없는 것을!” 김종길 시인은 구십고령(九十高齡)을 눈앞에 둔 당신의 인생을 ‘황락’이라는 시어로 표현했다. ‘황락’은 “가을철에 식물의 잎사귀가 누렇게 물들어 떨어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식물의 세계에서는 황락기를 거치면 다시 생명이 되살아나는 ‘소생기’인 봄이 찾아오지만, 인생에는 그것이 없다. 이 인생의 일회성이 인생 황락기의 애수(哀愁)의 근원”이라고 쓴 문장을 읽으니 뭉클해졌다.



 “아침이 오는 것이 그리 기쁜 일이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황금찬 시인의 글에 마음이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황금찬 시인은 한창때에는 매일 아침 단편소설 한 편이나 시 20편씩을 읽었다고 술회했다. 좋은 책을 대할 때에는 울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흔하던 눈물도 다 눈을 감고 뜨지 않는다”고 애석해했다.



 김남조 시인은 지난봄에 병으로 19일간 입원치료를 받았고, 여름엔 골절상으로 인해 참담한 나날을 보냈다고 근황을 소개하면서 “노년에 이를수록 기력은 쇠잔하고 감회는 깊어지면서 날마다가 참으로 심각합니다. 그러기에 삶을 더 소중히 여기며 더 성의 있게 살고자 합니다”라고 썼다.



 『유심』의 초대 덕택에 우리 시단의 어른들을 한자리에서 곧 뵐 수 있게 될 듯하다. “아내가 내미는 두 손을 붙잡고 간신히 일어난다”는 시단의 어른을 뵐 수 있을 것 같다. 잡지 『유심』의 초대장이 각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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