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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문예진흥기금이 절박하다

중앙일보 2014.11.18 00:09 종합 33면 지면보기
권영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도 한때 절망적인 시절이 있었다. 원고 뭉치를 들고 출판사 문을 두드렸지만 반기는 곳은 없었다. 결국 스코틀랜드 예술위원회의 창작 지원기금을 받고서야 해리포터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한 해 1조원의 수익을 올리는 작가의 성공 뒤엔 영국 예술위원회(ACE)의 문예진흥기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무엇보다 시급했던 우리의 197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의 국립예술기금(NEA)을 모델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설립하고 순수 문화예술 지원을 위한 문예진흥기금을 설치키로 한 것은 당시의 어려운 현실에서도 미래 문화강국을 꿈꾼 탁월한 포석이었다.



 당시 발표된 문예중흥 선언에는 이러한 소망이 구구절절 읽힌다. “한 겨레의 운명을 결정 짓는 근원적 힘은 그 민족의 예술적·문화적 창의력이다”고 밝히면서 문화의 활발한 국제교류를 통하여 인류문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이에 모든 문화인들은 온 국민과 동참하는 대열에 서서 예술과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풍토를 조성하고 정성을 다해 문예중흥을 이룩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문예중흥이 선언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출범한 정부는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로 삼고 있다. 물론 당시 물가를 감안해야 하지만 출범 초기 8억6000만원의 사업비에 불과했던 문예기금은 문화융성의 시대를 맞아 200배 이상 커진 1800억원대의 예산 규모로 기초예술 진흥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융성의 기조에 화답하여 올해는 문예기금으로 운영해온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이 건축전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 것을 비롯해 세계무대에서 우리의 젊은 예술가들이 연이어 빛을 발하고 있다. 비로소 한국 문화는 40년 전 문예중흥 선언에서 소망한 대로 ‘인류문화에 이바지’하는 문화융성의 시대로 한 발씩 다가서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국 문화예술진흥의 유일한 재원인 문예진흥기금이 곧 고갈될 위기에 처했다. 지난 40여 년간 문학, 미술, 공연, 전통예술 등 순수 기초 문화예술의 젖줄로 자양분을 공급해온 기금이 2017년도에는 전액 고갈되어 예산 편성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원래 영화관과 극장 등 입장권 수익의 6% 내외를 문예진흥기금으로 조성했던 모금제도가 2003년 폐지되면서 기금 고갈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매년 기금 고갈에 대한 국회와 문화예술계의 우려가 되풀이되었지만, 적립기금을 헐어 모자란 사업비를 충당하는 데 급급했을 뿐 이미 산소호흡기를 달기 시작한 문예기금의 근원적 안정화 대책에는 눈감아버렸다.



 물론 그동안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금 폐지 이후 복권기금 수익금 일부를 문화예술 분야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경륜·경정 수익금의 일부가 기금으로 전입되면서 고사 직전의 문예기금에 단비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복권기금은 그 용도가 소외계층 문화나눔 사업에 제한돼 있고, 경륜·경정 수익금은 늘어가는 문화예술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여 기금 고갈의 시기를 다소 지연시켰을 뿐이다.



 문예기금을 관리하는 예술위원회는 문화예술계와 더불어 척박한 예술 기부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기치를 내걸고 1인 1 예술나무 키우기 운동을 벌였다. 또 문화예술 후원센터를 설치하여 기업과 개인의 예술 후원 확대를 위해 노력한 결과 민간 기부금의 증가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문화강국의 내일을 준비하는 근본적 대안으론 미약하다.



 문예기금의 영세성은 국내 타 기금과 비교하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문예기금의 올해 예산 규모는 관광기금, 체육기금의 20% 수준에 그치고 있고 우리나라와 비슷한 지원체계를 갖고 있는 영국 예술위원회의 15% 수준에 불과하다. 한정된 예산으로 연간 6000여 건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소액다건식(小額多件式) 지원이 많은 현실은 실로 참담하기까지 하다.



 “예술은 우리 인간성의 바탕을 이룬다. 예술은 창의성과 선량함, 아름다움에 대한 배양을 통해 우리에게 품격을 부여하고 감동을 준다. 예술은 우리의 가치관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고 문화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며 인종, 종교, 나이에 대한 차별 없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준다. 삶이 힘들 때 예술은 아픔을 치유해 준다.” 미국의 예술 후원 기구인 AFTA(Americans For The Arts)의 예술을 지원해야 할 10가지 이유 중 첫 번째 이유다.



 문화예술은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삶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척도이며 문화예술의 향유는 이제 국민의 기본권이 되었다. 국민의 문화적 권리를 신장하고 한 나라의 경쟁력을 견인하는 창의력과 창조성의 뿌리가 문화예술로부터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의 문화예술 토양은 국가 발전 수준에 비하면 너무 척박하고 초라하다. 문예진흥기금의 안정적 확보는 그래서 더욱 절박한 것이다.



권영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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