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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달인 저우언라이 믿었다가 인생 바뀐 장제스

중앙선데이 2014.11.16 03:01 401호 29면 지면보기
북벌(北伐) 전쟁 시절 현지 주민들과 어울려 기념촬영을 한 황푸군관학교의 학생병과 교관들. 1926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사진 김명호]
공동의 목표를 향해 두 개의 집단이 연합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밀월기는 잠깐, 뭔가 될 듯하면 분열 조짐이 일어난다.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다. 서로 상대방 탓하며 목에 힘줄을 세운다. 무장집단일 경우 피비린내가 진동할 수밖에 없다. 이유도 그럴듯하고 명분도 그럴듯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백성만 골병이 든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00>

황푸군관학교도 설립 초기에는 패가 갈리지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추천을 받고 입학한 학생들이었지만 네 편 내 편 따지며 몰려다니지 않았다. 레닌이 광저우에 파견한 국민당 최고고문 보르딘의 조수였던 장타이레이(張太雷·장태뢰)의 부인 왕이즈(王一知·왕일지)는 그때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1991년 상하이의 한 병원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학내의 공산당원들과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장타이레이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등 공산당원들과 자주 어울리며 가끔 춤도 췄다. 보르딘의 측근이었던 황푸 출신 공산당원 중에는 장제스가 아끼는 제자들이 많았다. 이 청년 장교들은 틈만 나면 장제스의 집을 출입했다. 장제스의 부인 천제루(陳潔如·진결여)가 해주는 밥을 먹고 때로는 시장도 따라다녔다. 저우언라이는 천제루가 무거운 물건이라도 들고 가면 달려가곤 했다. 장제스 부부와 풀밭에 나란히 앉아 얘기 나누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이랬던 사람들끼리 훗날 사생결단을 벌였다. 정치가 뭐고, 권력이 뭔지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나도 현장에 있었지만 왜들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문제는 저우언라이였다. 정치부 주임 저우언라이는 친화력이 남다른, 타고난 선동가였다. 취임과 동시에 ‘중공 특별지부’를 출범시키고 당원들을 끌어 모았다. 학생·교관을 가리지 않고 출신성분도 따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전체 학생의 30%가 공산당 입당을 자원했다.

군관학교의 국민당원과 공산당원은 조직체도 결성했다. 국민당원 중에서 반공을 주장하는 학생들이 ‘쑨원주의학회(孫文主義學會)’를 만들어 회원들을 끌어 모으자 공산당도 ‘청년군인연합회’를 선보였다. 쑨원주의학회는 훗날의 국민당 부총재 천청(陳誠·진성)의 지도를 받았다. 국·공 내전 시절 공산당 근거지 옌안(延安)을 점령하는 후중난(胡宗南·호종남)과 황푸 최고의 미남 장링푸(張靈甫·장영보) 등이 주도했고, 청년군인연합회는 저우언라이에게 홀린, 뒷날 중국홍군의 맹장들이 주축을 이뤘다.

패가 갈린 학생들은 학내에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밥 먹다 말고 밥그릇 집어 던지는가 하면, 몽둥이까지 동원해 난투극 벌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말이 좋아 상아탑이지 세상사에 무관심한 상아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특징은 있었다. 훈련받을 때나 지방 군벌들과의 전쟁터에서는 전우애를 발휘했다.

광둥(廣東) 지역 군벌들과의 전쟁에서 저우언라이의 정치공작은 빛을 발했다. 출동 직전 지역 방언에 능한 학생 20여 명을 선발해 ‘무장선전대(武裝宣傳隊)’를 꾸렸다. 선전대원들은 군대가 지나갈 마을에 표어를 붙이고 전단을 살포했다. 어린애들에게 눈깔사탕 나눠주며 “열강 타도, 군벌 제거”로 시작되는 국민혁명가를 가르쳤다. 해가 지면 모닥불 앞에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군벌과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최종 목표가 중국의 통일이라고 하면 박수갈채가 터졌다.

정치부는 적군 병사들에게 보내는 포고문도 준비했다. 비행기를 이용해 적 진지 상공에서 살포했다. 문맹자들이 많다며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볼 사람은 본다”는 저우언라이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선전대가 지나간 지역에 도착한 황푸의 학생병들은 민중공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지의 농민협회와 학생회, 교직원 연합회 조직에 힘을 보태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했다. 중국 역사상 이런 군대는 처음이었다. 훗날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도 높은 점수를 줬다. “국민당은 황푸군관학교에 당 대표를 두고 정치부를 설립했다. 이런 제도는 군대의 면목을 일신시켰다.”

정치교육을 받은 황푸의 학생병들은 젊고 당당했다. 부녀자 희롱하고 술값이나 밥값 떼먹는 등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후배들에게도 엄했다. 혹독한 훈련을 시킬지언정 구타는 상상도 못했다.

저우언라이는 광둥 지역 군벌과의 전쟁에서 정치공작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런 저우언라이를 장제스도 신임했다. 군관학교의 군사관제법 판공실과 자신의 직계들로 구성된 국민혁명군 제1군의 정치부를 통째로 맡겨버렸다. 화근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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