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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지킨 판소리 얼마나 좋은지 꼭 들어보세요”

중앙선데이 2014.11.15 06:10 401호 17면 지면보기
창작 판소리의 아이콘인 소리꾼 이자람(35)이 신작을 올린다. 지난 2월 두산아트센터의 젊은 창작자 지원프로그램인 ‘두산 아트랩’의 워크숍 형태로 관객을 먼저 만났던 주요섭 단편선 ‘추물/살인(11월 20~23일, 두산아트센터)’을 갈고 닦아 초연 무대를 갖는 것.

주요섭 단편으로 판소리 만드는 이자람·박지혜

그런데 소리꾼으로 무대에 오르지는 않는다. 자신이 이끄는 ‘판소리 만들기 자’의 소리꾼 김소진과 이승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대본과 작창, 예술감독으로 물러섰다.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소리꾼들에게 자기 작품을 만들어 주겠다는 의도다.

드라마투르기와 연출은 요즘 가장 실험적인 연극을 하는 집단으로 알려진 양손프로젝트의 젊은 연출가 박지혜(30)를 초빙해 한결 절제된 무대로 완성했다. 여기저기서 ‘새로운 판소리’의 탄생을 알리는 요즘, 기본으로 돌아가 ‘진짜 판소리’의 영역을 다지고 소리꾼들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두 여자를 만났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 파마머리를 풀어헤친 두 여자는 자매 같았다. 5살 나이 차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다정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존경을 가득 담은 눈빛을 번번이 교환했다. 양손프로젝트 연극의 열성팬으로 모든 공연을 챙겨봐 왔다는 이자람이 어느 날 공연장에서 만난 박지혜에게 홀딱 반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단다.

“그날 저는 공연과 박지혜라는 사람을 같이 관람했어요. 며칠 동안 계속 해 온 공연임에도 흥미 가득한 관객처럼 자기 공연을 보더라고요. 아, 저것이 내가 만나고 싶은 연출가의 모습이라 생각했죠. 원래 ‘양손’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극단 중 하나기도 해요. 판소리가 혼자서 여러 세계를 관객의 상상으로 불러일으키는 장르인데 양손이 하는 것도 그런 미니멀리즘이거든요. 제가 하는 작업과 닮아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 왔죠.”(이)

“저도 판소리라는 장르도 좋아했고 사천가를 흥미롭게 봤어요. 제가 단편소설 작업을 막 시작한 시점에 자람 언니가 나타났죠. 단편소설과 판소리를 같이 해보자면서요. 주요섭 작가를 좋아해서 연극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후보군 상위에 랭크돼 있다가 탈락됐던 작품 ‘추물’을 내미는 거에요. 모든 것이 흥미로웠죠. 단편소설로 판소리 하는 것도, 판소리 장르 자체도, 이자람도 다.”(박)

두 사람의 접점인 주요섭은 20세기 초 격변하는 한국 사회 속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가다. ‘추물’은 첫날밤도 못 치르고 남편에게 소박맞은 추녀 ‘언년’, ‘살인’은 꽃다운 나이를 매음으로 보내며 살아온 창부 ‘우뽀’의 이야기다. 이자람은 전작 ‘사천가’ ‘억척가’에 이어 주요섭을 통해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겪어야 하는 말못할 고통을 토로해 낸다.

주요섭을 택한 이유는 뭔가요.
이: 작품은 본능이 골라요. 이유는 나중에 찾죠. 본능의 레이더가 서치하다가 주요섭이라는 독특한 소설가에 꽂힌 거에요. 한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글들을 많이 남긴 분이에요.

주요섭 하면 『사랑손님과 어머니』잖아요.
이: 처음엔 ‘사랑손님’과 ‘추물’을 같이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혜를 만나 판소리가 뭔지 서로 얘기하는 과정에서 ‘사랑손님’은 탈락했죠. 이미 옥희라는 서사자가 얘기를 하고 있어 소리꾼이 개입할 공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거죠. 대신 지혜가 ‘살인’을 제안했구요.

서사자가 이미 있으니 더 쉽지 않나요.
박: 물론 소리꾼이 옥희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판소리의 매력은 우리가 ‘이자람 판소리’라 기억하듯, 관객이 소리꾼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에요. 그런데 ‘사랑손님’은 옥희 시선으로 들어가야 재미있는 작품이죠. 이야기적으로도 이유가 있어요. 재혼을 하면 안 되고 남녀가 가까이 있으면 안 되는…요즘 시대와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이기에 겪는 고통도 요즘 시대와 거리가 느껴지는데요.
이: 그럼 지금 시대에 필요한 게 뭔가요. 2014년은 그런 담론들이 고루하게 느껴지는 시대인 것 같아요. 하지만 서민과 계급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시대나 있어야 되요. 언년에게 공감하는 것은 그 시대에 힘들었다는 게 아니라 지금도 못생긴 여자가 후진 동네에 태어난 조건들이 계급을 매긴다는 거에요. 언년이는 지금 태어났어도 가난하기에 성형수술도 못 받고 돈을 모으기까지의 과정이 험난했겠죠. 내가 하고픈 얘기는 옛날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풀리지 않을 계급과 물질의 문제들이고, 이런 이야기를 죽을 때까지 할 거에요. 내가 부당하거나 슬프다고 느끼는 이야기를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어서요.
박지혜가 속한 양손프로젝트는 무대장치도 거의 쓰지 않고 온전히 배우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결과물들로 주목받고 있는 독특한 연극집단. 연출과 세 명의 배우가 대본도 없이 즉흥 연기를 바탕삼아 공동창작 방식으로 작품을 만든다. 배우가 연출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만드는 작업을 연출이 정리하는 식이다.
“‘무대에는 아무것도 없다’로 시작하기에 굳이 없어도 배우가 만들 수 있는 것은 들여오지 않으려 해요. 그게 더 재밌는 것 같아서요. 워낙 요즘 공연들이 무대장치도 화려하고 조명도 음향도 화려한데, 그런 것들은 또 다른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한 거지만 우리는 연극이 배우의 몸, 그 에너지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거든요.”(박)

실험적인 연극을 하는 입장에서 판소리의 매력은.
박: 실험적인 연극이라기보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연극을 만들까 실험하는 입장에서 판소리는 정말 대단한 장르에요.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태도가 엄청나게 복잡한 레이어죠. 자연인 소리꾼이 나와서 시작해 이야기꾼으로 변신하는 지점이 있고, 그가 다루는 인물들, 또 이야기꾼을 바라보는 소리꾼이 있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관객들을 배려하고…. 한 명의 퍼포머가 관객과 맺는 관계의 다양성이 놀랍고 이걸 지금껏 하고 있었다는 게 신기한데, 춘향가나 흥보가 외에는 본 적이 없잖아요. 당연히 새로운 걸 만들어보고 싶죠.

판소리에서 연출의 역할이 뭔가요?
박: 2월 워크숍에선 불필요한 걸 다 빼주는 역할을 했어요. 이야기에 소리를 깨끗하게 얹고 싶었어요. 이전 공연에서 너무 많이 넣었던 걸 다 빼 보면 다음 공연에 뭐가 필요한지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판소리라는 장르에서 연극 연출처럼 할 수는 없어요. 판소리가 부족해서 연극적인 걸 넣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걸 경계하는 게 제 역할이에요. 판소리란 장르가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기를 넣고 조명을 때리고, 이런 걸 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 연출과 예술감독으로서 우리 둘의 밸런스가 잘 맞아요. 박지혜라는 연극 공부한 사람이 판소리의 훌륭한 점 발견해주고 훼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반대로 나는 판소리 공부한 사람이 연극적인 것을 하려 하고…. 서로의 영역에 대한 존중이 확고해서 판소리가 가진 연극성과 박지혜 연극의 비워짐이 서로 침범하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밸런스를 찾는 것 같아요.

이자람이 직접 출연하지 않으니 티켓파워가 덜하지 않나요.
박: ‘판소리 만들기 자’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소리꾼 두 명이 돋보일 기회를 주려는 거에요.
이: ‘추물’은 정말 김소진의 것이고 ‘살인’은 이승희 것이에요. 제가 해도 그렇게 안 되죠. 요즘 잘하는 소리꾼은 많은데 그 사람에게 맞는 작품 써 줄 작가가 없는 게 지금 판소리계 현실이에요. ‘사천가’를 하느라고 이자람의 그늘에 가려있던 아름다운 두 소리꾼을 무대에 잘 세워주고 싶은 거죠. 저도 배우는 게 많아요. 밖에서 작가로서 관찰하는 이 시간이 소리꾼 이자람에게 또 다른 걸 주는, 모두에게 이로운 시간이죠.

사천가, 억척가와의 차별점이라면.
이: 얼마 전 두 작품에 대한 외국인들 평의 공통점을 문득 깨달았어요. ‘너무 잘된 판소리의 서구화’라는 건데,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어요. 하지만 브레히트기 때문에 그들 눈에는 동양인이 브레히트를 판소리로 잘한 것 정도로 여겨지는 거죠. 브레히트나 주요섭이나 본능에 맞닿아서 해보고자 하는 이야기일 뿐인데 남들 눈에는 서구화로 비치는 거죠. 그렇게 보는 이들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요즘 새로운 판소리가 많이 나와 이자람의 작업이 상대적으로 덜 새로워 보이는데요.
이: 저는 ‘새로운 판소리’라고 얘기하지 않아요. 그냥 판소리라고 하죠. 저는 판소리의 ‘현대화’도 아닌 ‘현재화’ 작업을 처음 한 사람일 뿐, 앞으로 이런 작업은 우후죽순 생길 거에요. 남들 보기에 똑같은 것만 한다고 여겨져도 제가 좋아하는 판소리에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담는 일을 계속 하려고요.
박: 전통을 여러 가지로 발전시키고 새롭게 보여주려는 작업이 많죠. 훌륭한 전통을 관객과 소통할 방법을 찾으려는 건데, 오히려 전통에서 좋은 점들이 바뀌면서 버려지는 걸 느껴요. ‘추물/살인’을 시작할 때 개인적 목표는 판소리가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장르인지 알자는 거였죠. 진짜 아름다움을 모르면서 어떻게 새로운 걸 만드나요. 변형시켜 재밌는 것이 아니라 판소리여서 재밌는 것을 찾아야 되고, ‘추물/살인’은 많은 창작판소리 중 좀 더 거기에 가깝지 않을까 해요.
이: 판소리라는 장르는 굉장히 특수한데 뭉뚱그레 연극으로 분류되거나 전통으로 분류돼 아쉬울 때가 많아요. 판소리의 카테고리가 명확해진다면, 새롭다는 많은 작업은 판소리가 아니라 다른 장르로 들어가야죠. 판소리의 창법을 쓰되 판에 대한 개념은 없는 작업들이 많잖아요. 음악적인 부분만 부각시킨다든가, 소리꾼의 태도를 가져가서 연극에 활용한다든가. 판소리의 기교를 갖고 실험을 하는 거지 판소리 자체로 칼을 뽑은 작품은 아니죠. 반면 우리 작업은 판소리라는 카테고리를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일이에요. 그 모든 작업들에 비해 잘해갔으면 좋겠고, 판소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기면 100년은 더 가지 않을까요.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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