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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반기문 신드롬’으로 본 대선 잔혹사

중앙일보 2014.11.15 00:33 종합 11면 지면보기
제3후보. 제1당, 2당에 몸담은 정치인이 아니면서 대중 지지도를 바탕으로 선거판의 변수로 등장한 인물들. 대통령 선거 때만 되면 등장하는 한국 정치의 데자뷰(Deja vu·旣視感)다.


제3후보 모두 ‘11월의 벽’ 못 넘어 … 문제는 조직력

 1992년 대통령선거의 정주영과 박찬종, 97년 이인제, 2002년 정몽준, 2007년 고건·문국현, 2012년 안철수…. 이들 중 정몽준·고건·안철수 세 사람은 대선 후보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거나 단일화협상 과정에서 낙마하면서 ‘예비 주자(走者)’의 위치에 그쳤다. 하지만 기존 군소 정당 후보와 달리 매번 위협적인 변수로 떠올라 판을 흔들어 왔다. 다만 제3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한국 정치사에서 아직 없다.





 2017년 대선을 3년이나 앞둔 상황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정치권의 제3후보로 화제가 되고 있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한 여론조사 결과 전체 판을 뒤엎을 만한 파괴력 있는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원내 1당 새누리당의 친박계와 2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이미 공개적으로 러브콜까지 보냈다. 원내 1당과 2당의 주요 정파들이 앞다퉈 제3후보의 세력이 돼 줄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이대로라면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처럼 정치권 밖의 제3후보론으로 출발해 제1당 또는 2당의 후보가 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반 총장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다. 반 총장 스스로 정치를 할지 말지조차 언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도 여론조사에서는 선두다. 역대 제3 후보들처럼 대중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원조 제3후보’로 불리는 박찬종 변호사의 말을 들어봤다. 그는 대뜸 자신을 위한 ‘항변’부터 하겠다고 했다.



 “박찬종, 고건, 안철수 등을 도매금으로 묶는 건 틀렸다. 나는 대선을 완주했다. 전투엔 졌지만 ‘현상’으로 소멸된 게 아니다.”



 - 이번엔 ‘반기문 현상’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박근혜 대통령까지 모두 국회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 각종 선거에서 낙선·낙마 등 쓰라린 경험을 했다. (대선에)나오려면 먼저 (현실정치를) 훈련 받아야 한다.”



 - 그럼에도 반 총장의 상품성을 많은 이가 인정한다.



 “그는 외교관이다. 현실에 내려와 포장을 뜯었을 때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금방 판명난다.”



 박 변호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전문가도 많다. 특히 ‘반기문 현상’은 과거와 달리 유력주자의 ‘대세론’이 없는 상황에서 터져 나왔다. 앞으로 이원집정부제 등 외치와 내치를 분리하는 방향의 개헌론이 불붙게 되면 유엔 사무총장 출신이라는 유명세에 더해 주가는 더 오를 수도 있다.



 - 반 총장에 대한 전망이야 어떻든 역대 제3후보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뭔가.



 “영호남 지역 패권에 기반한 재벌정당의 기득권 때문이다.”



 92년 대선에서 박 변호사는 6.4%를 얻어 4위에 그쳤다. 김영삼(42%), 김대중(33.8%) 후보가 맞붙은 데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16.3%)까지 뛰어든 결과였다.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을 자임했던 정 전 명예회장은 나름 선전했다. 그는 “내 돈으로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며 기존 정치권을 공격한 또 다른 제3후보였다. 당시 주요 공약이 ‘반값 아파트’와 ‘전면 무료급식’ 등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의 정치권을 달구는 이슈들이다.



 97년 대선에선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대표가 맞붙었다. 그러나 이인제 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등장했다. 경기지사였던 이인제 최고위원은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진 뒤 자기 자리로 돌아갔으나 이후 상황이 복잡해졌다. 장남의 병역 면제 논란이 불거지며 이회창 전 대표의 지지율이 10% 근처까지 떨어졌다. 그러는 사이 이 최고위원의 지지율은 30%대를 돌파했다. 지지자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는 신당을 만들어 출마했다. 결과는 패배(19.2% 득표)였다. 그의 말을 들어봤다.



 - 경선 불복이란 비판이 많았다.



 “내가 경선이 불공정했다거나 불복한다고 한 적은 없다. 다만 당시 우리 당 후보의 지지율이 1주일 만에 55%에서 7%로 떨어졌다. 그 상태가 두세 달을 갔다. 고민이 깊었다. 그 결과였다. 역사의 평가는 나 스스로 받고, (결과를)받아들이겠다.”



 - 제3후보가 한계에 부닥치는 이유는 뭔가.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국민의 정치적 요구가 제3지대에서 폭발하는 거다. 그러나 알맹이가 없을 때는 현상으로 머물다 끝난다. 정당정치가 건강해져 정당의 틀 안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결정되는 게 정상이지만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2002년 16대 대선에선 정몽준 전 의원이 떴다. 월드컵 이후 그의 지지율은 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크게 앞섰다. 추석(9월 24일) 직후 지지율(코리아리서치 조사)이 정몽준 전 의원 26.1%, 노무현 전 대통령 16.8%였다. 그러나 그는 대선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지면서 본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17대 대선을 2년 앞둔 2005년에는 고건 전 국무총리가 부각됐다. 노 전 대통령이 탄핵당했을 때 대통령직을 대신 수행하면서 보인 안정성과 행정 경험이 바람의 바탕이었다. 그러나 대선을 11개월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새로운 대안정치 세력의 통합에 한계를 느꼈다”면서다. 결국 유한킴벌리 사장 출신의 문국현 전 창조한국당 대표가 제3후보로 출마했으나 5.8% 득표에 그쳤다.



 2012년 18대 대선에선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바람이 불었다. 역대 제3후보 중 가장 강력한 바람이었다. 정치를 하지 않고 있던 그의 지지율은 압도적이었다. 한때 박근혜 대통령과의 양자대결은 물론이고, 지금은 같은 당에 있는 문재인 의원(당시 민주통합당)을 포함한 3자 대결에서도 1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안 의원은 대선을 석 달 앞둔 9월 출마 선언을 했다. 하지만 기세가 꺾이자 문재인 의원과 단일화 협상에 임했다가 11월 23일 스스로 물러났다.



 제3후보의 공통점은 대선이 있는 해 ‘11월의 벽’을 넘기지 못 했다는 점이다. 97년 대선 때 이인제 최고위원은 11월 중순부터 이회창 전 대표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2002년의 정몽준 전 의원 역시 11월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추월당했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문재인 의원이 박빙의 승부를 펼치기 시작한 시점도 11월 중순이었다. 제3후보에게 11월은 잔인했다. 전문가들은 “세력이 부족한 제3후보는 장기전에서 기존 정당에 열세를 보일 수밖에 없고, 그게 선거가 임박해지는 11월에 극대화돼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세력 말고 중요한 게 또 있다. 바로 ‘권력 의지’다. 이정희(한국외대 정치학) 교수는 “제3후보의 성패를 결정하는 또 다른 요인은 본인의 의지”라며 “불가피한 막판 지지율 하락을 견딜 추진력은 결국 본인의 강한 권력 의지뿐”이라고 말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S BOX] 2000년 미 대선 후보 네이더, 고어 낙선에 결정적 역할



세계적으로도 제3후보가 대권을 거머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들은 선거 판도를 바꾸는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다. 특히 내각책임제인 유럽보다 대통령제인 미국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



 가장 극적인 제3후보로는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랠프 네이더가 꼽힌다. 당시 텍사스 주지사인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와 현직 부통령이던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맞붙은 선거에서 인권변호사 출신인 네이더는 2.7%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득표율 1%포인트 차이로 승부가 갈린 플로리다·위스콘신 등에서 고어의 표가 네이더로 분산된 것이 치명적이었다. 고어는 전국적으로 더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밀려 고배를 마셨다. 워싱턴포스트는 “(네이더가)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 참가하지 못하고 선거자금도 부족한 열악한 상황에서 효과적인 선거운동을 벌였다”며 “그의 선전이 비슷한 성향인 고어의 낙선으로 이어진 것은 아이러니”라고 분석했다.



 1992년 무소속 돌풍을 일으켰던 로스 페로는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화당·민주당 후보와 함께 3자 TV토론까지 하며 18.9%의 표를 얻었다. 그러나 승자가 주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미국 대선에서 단 한 명의 선거인단도 확보하지 못한 채 퇴장했다. 페로가 공화당 성향의 표를 잠식하며 아칸소 주지사이던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현직 대통령이던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유럽에서는 2002년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파 쇼크’를 불러온 장마리 르펜 당시 국민전선(FN) 당수가 대표적인 제3후보로 꼽힌다. 그는 사회당 후보인 리오넬 조스팽 당시 총리를 3위로 밀어내고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1차 투표에서 패배한 사회당과 군소 좌파정당들이 “극우정당의 집권을 막자”며 이념을 초월해 우파 후보인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에게 몰표를 주면서 르펜은 고배를 마셨다.



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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