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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이젠 근로자 밥상까지 넘보는 정부

중앙일보 2014.11.13 00:05 종합 33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2001년 정부는 국회와 근로자에게 읍소했다. 모성보호 관련 법을 개정하면서다. 법 개정으로 출산 전후 휴가가 60일에서 90일로 늘면서 이에 따른 지원금도 크게 불어나게 됐다. 정부의 일반회계나 국민건강보험으로 충당해야 하는 돈이다. 다급해진 정부는 “재정상황이 좋지 않다”며 “당분간 고용보험기금에서 관련 비용을 지출토록 도와달라”고 고개를 숙였다. 근로자가 월급에서 조금씩 떼서 실업과 같은 위기상황에 쓰려고 모아둔 비상금 성격의 사회보험을 정부 정책 집행에 쓰는 것이 미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른 시간 안에 일반회계와 국민건강보험으로 충당토록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국회와 근로자에게 했다.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당시 정부의 약속과 미안함은 온데간데 없다. 오히려 당당하게 정책집행에 고용보험기금을 끌어쓰고 있다. 내년 예산안에 따르면 일반회계에서 지출하다 고용보험기금으로 슬며시 떠넘긴 사업예산이 1695억원에 달한다. 실업자의 국민연금을 고용보험기금으로 대납하는 사업까지 만들었다. 사회보험으로 사회보험을 돌려막는 정체불명의 사업이다. 심지어 내년부터 정부 소속 직원의 월급(565억원)까지 고용보험기금으로 지급할 계획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고용 인프라 구축사업은 정부 예산으로 지급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잘못된 걸 알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이러는 동안 고용보험기금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방하남 전 고용부 장관이 재임 시절 “근로자에게 고개를 못 들겠다”며 속죄할 정도로 사정이 심각하다. 지난해 기금의 적립배율(해당 연도 지출액 대비 적립금 비율)은 0.4에 불과했다. 관련 법에 정한 적립배율(1.5~2배 미만)에 한참 못 미친다. 오죽하면 전문가들이 “이대로 가면 기금이 2016년 이후 고갈될지 모른다”는 사실상의 사망진단서까지 내놓았을까. 1998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같은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하면 실업급여조차 못 받는 근로자가 생길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다.



 정부만 탓할 수도 없다. 이를 감시할 노동계와 경영계도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전 세계 어느 나라 노사든 실업연금과 같은 사회보험이 오염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한다. 위기에 처한 근로자를 도울 수 있는 마지막 보루여서다. 하지만 15년 동안 우리 노사는 심각하게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없다. 오히려 무상보육, 무상교육과 같은 정치권의 무상 시리즈에 끌려다니는 장면만 보여줬다. 사회보장책과 복지 확대를 놓고 다투기보다 있는 사회보장제도라도 제대로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게 열심히 생산현장을 지킨 근로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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