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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한·일 FTA가 용의 눈이다

중앙일보 2014.11.13 00:02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정재
논설위원
사람의 뇌는 처음 얻은 정보를 나중 얻은 정보보다 더 잘 기억한다. 그 결과, 나중에 접한 정보는 처음 정보가 뭐였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처음 정보가 잘못 입력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안 믿게 되는 이유다. 심리학에선 ‘초두효과(初頭效果, primacy effect)’라고 하는데, 백지에는 먼저 그리는 사람이 임자란 얘기다.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내게 초두효과는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다. 2003년 가을, 그는 한 편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한·중·일 FTA의 의미와 효과를 정리한 글이었다. 요지는 이랬다. “한·중, 한·일 FTA가 우리의 살길이다. 한·일, 한·중은 FTA를 할 수 있어도 중국·일본은 못한다. 두 나라 국민 간 간극은 우리보다 훨씬 넓고 크다. 우리가 중간에서 일본·중국을 연결하면 동북아가 평화롭게 번영할 수 있다. 그게 경제는 물론 외교·안보에도 최선이다.”



 이때부터 강봉균의 한·중·일 FTA론은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내게 다가와 꽃이 됐다’. 강봉균은 김대중 정부의 경제수석을 지냈다. 한·일 FTA는 1998년 일본을 찾은 DJ가 처음 얘기했다. 그때 DJ는 ‘21세기 새 한·일 파트너십 계획’의 첫머리로 한·일 FTA를 올렸다. 강봉균은 당시 DJ와 한·일 FTA에 대해 깊이 교감했고 시간이 흘러 이를 ‘한·중·일 FTA 동북아 평화번영론’으로 확대재생산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강봉균 초두효과’를 벗어나 보려 했으나 결과는 부질없었다. 한·중·일 FTA가 화제가 될 때마다 나는 그에게 습관처럼 물었다. “아직도 한·중·일 FTA가 답이냐”고. 그의 대답은 늘 “그렇다”였다. 10여 년 세월을 지나면서 한·중·일의 정치·경제·외교 지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되레 그의 한·중·일 FTA론은 더 단단해져 갔다. 한·중 FTA가 타결된 다음날인 11일 나는 또 그에게 전화를 했다. 몇 달간의 병고 끝이라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그의 대답은 ‘역시’였다.



 -한·중 FTA가 타결됐다. 다음은 일본인가.



 “그렇다. 일본을 끌어들여 한·중·일 FTA로 가서 동북아가 한 덩어리가 돼야 한다. 일본도 중국 시장 없이는 생존이 안 되니, 자극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쇠도 달궈졌을 때 때려야 한다. 한·일 FTA가 힘을 얻을 수 있는 적기다.”



 -한·일 관계가 최악인데.



 “그럴수록 FTA가 답이다. 정치는 부담스럽지만 FTA는 덜 부담스럽다. 경제를 앞세우면 아베나 박근혜 대통령도 움직이기 쉬워진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중국과 FTA 협상 룰을 우리가 먼저 정했으니 그만큼 유리하다. 일본도 우리의 룰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한·중 FTA면 충분한 거 아닌가. 한·일 FTA로 추가로 얻을 게 많지 않아 보인다.



 “중국은 미·일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해 중국을 왕따시키려 한다고 생각한다. 한·중 FTA는 미·일에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는 중국의 의지가 많이 담겼다. 친중(親中) 아니냐는 미·일의 시각이 우리로선 부담이다. 한·일 FTA가 그런 부담을 확 덜어줄 것이다. 한·일 FTA는 미·중의 패권 경쟁에서 한반도의 주체적 번영을 약속하는 보증서가 될 수 있다.”



 그의 한·중·일 FTA론은 이게 끝이 아니다. 그는 “북한을 끼워 넣어야 비로소 완성품이 된다”고 했다. “북한을 개혁시키긴 어렵지만 개방시키는 건 비교적 쉽다. 개방이 되면 개혁은 저절로 따라온다. 그러려면 한·중·일 FTA의 틀에서 북한을 녹여야 한다. 형식도 맞고 북한의 거부감도 줄일 수 있다.” 그는 미얀마 모델을 예로 들었다. 오바마는 중국 견제를 위해 ‘악의 축’‘폭정의 전초기지’ 미얀마를 재평가했다. 2009년부터 특사를 파견하고 원조를 시작했으며 경제제재를 풀었다. 그 결과 미얀마는 외자유치와 금융시장 개혁 등 본격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고 있다. 그는 확신했다. “북한을 우선 미얀마처럼 만드는 것, 그래서 동북아 평화번영의 길을 여는 것, 한·일 FTA가 그 마법의 성을 여는 열쇠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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