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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망자에 대한 예의는 누가 정할까

중앙일보 2014.11.13 00:02 종합 35면 지면보기
2011년 1월 28일 밤, 피 흘리며 등에 업혀 골목에서 나오는 청년들을 봤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 주변에서였다. 시위 중에 다쳤으려니 생각했다. 그들이 경찰의 총에 맞았다는 것은 몇 시간 뒤에야 알았다. 시위대는 사망자가 1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고, 이집트 정부는 발포 사실 자체를 전면 부인했다.



 다음 날 다시 광장으로 갔다. 사인을 포함한 진상의 규명을 요구하는 ‘장례 투쟁’이 들불처럼 번지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조용했다.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이슬람권에서는 시신 부검을 극도로 꺼리며 통상 사후 24시간 이내에 장례를 마친다는 것을. 그 결과 죽음이 곧바로 투쟁의 동력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1994년 9월 발트해에서 여객선 MS 에스토니아호가 침몰했다. 989명의 승객·승무원 중 852명이 목숨을 잃은 대참사였다. 건져낸 시신은 94구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거의 다 배 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수습을 책임진 스웨덴 정부는 석 달 뒤 수색을 중단했다. 배 인양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철학자·법학자 등 각계의 원로급 전문가들로 만든 특별윤리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일이었다. 위원회의 첫째 반대 이유는 시신 훼손 가능성이었다. 온전히 수습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그 다음으로 장기간 물속에 있던 시신을 보게 될 가족과 다른 관련자들의 정신적 충격 등이 이유로 제시됐다.



 에스토니아호는 지금 바닷속에 그대로 있다. 콘크리트로 봉인돼 있다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데, 스웨덴 정부가 봉인을 시도하다가 기술과 비용의 문제 때문에 포기했다. 그 뒤 20년간 ‘수장’을 둘러싼 논란이 종종 일었다. 유족들이 선체 수색을 금지한 특별법을 어겨가며 잠수사를 고용해 개별적으로 시신을 찾으려다 적발된 일도 있었고, 몇몇 유족이 스웨덴 정부를 유럽인권재판소(ECHR)에 제소하기도 했다. 각종 음모론도 나왔다. 스웨덴이 에스토니아를 통해 소련이 개발한 비밀병기를 몰래 감춰 들여오려다 배에서 모종의 사고를 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긴 해도 국민은 대체로 정부의 결정을 지지해 왔다.



 실종자 9명을 남겨놓은 채 세월호 인양 여부를 가려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에겐 공통의 종교적 믿음이 없다. 국민 대다수에게서 신망을 받는 원로급 인사도 극히 드물다. 공직자들은 눈치 보며 우물쭈물하고 있다. 산 넘어 산이다.



이상언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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