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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기억과 4명의 뮤즈가 창작의 원천

중앙선데이 2014.11.08 02:53 400호 14면 지면보기
1952년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그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작가의 신화를 써내려간 인물 중 맨 앞자리에 서있다. 그의 신화는 20세기 초의 굵직한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게다가 이탈리아, 파리, 마이애미, 쿠바 등 장소를 옮길 때마다 새 작품과 새 연인이 함께했다.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4> 헤밍웨이 신화

열아홉 살 헤밍웨이는 적십자사 운전병에 자원하면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물건을 수송하는 것이 주업무였지만 포화의 한가운데서 부상병을 도운 공로로 훈장까지 탄다. 그렇게 소년은 전쟁 영웅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온다.

1921년에는 파리로 간다. 특파원 신분으로 무솔리니와 인터뷰를 하는 등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파리가 중요했던 이유는 화가 피카소,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등의 예술가와 교분을 쌓을 수 있는 문화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통해 헤밍웨이는 ‘로스트 제너레이션’(길 잃은 세대)의 선두주자가 된다.

37년에는 종군기자가 되어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그는 이 일이 단지 스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생각은 당시 헤밍웨이를 비롯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내전을 바라보는 공통적인 정서였다.

44년 미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하자 2차 세계대전에도 뛰어들어, 다시 파리에서 한 시절을 보낸다.

원고 작성법도 남달라서, 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자판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선 채로 타자기를 두드렸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20세기 미국 문학사의 전반부를 채웠다.

아내만 네 명 … 작품 탄생에 기여
정력적인 사내의 개인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헤밍웨이의 첫 번째 부인은 연상의 해들리 리처드슨이다. 그녀와 함께 파리에서 보낸 시절을 통해 헤밍웨이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27년에는 ‘보그’의 편집자로 일하던 폴린 파이퍼와 결혼한다. 부유했던 폴린 덕분에 마이애미 키웨스트로 건너가 낚시를 하며 여유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다룬 『무기여 잘 있어라』(1929)를 쓴 것은 그녀와 함께한 기간 중이었다. 하지만 키웨스트의 삶이 녹아 있는 작품은 바다 사나이 해리 모건을 내세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1937)다.

세 번째 부인은 저널리스트 마서 겔혼이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 중에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결혼을 한 해에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를 내놓았고, 두 사람은 20세기의 현장을 고루 돌며 기사와 작품을 남겼다. 이들의 휴식처는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쿠바였다.

헤밍웨이의 말년을 지킨 아내는 네 번째 부인 메리 웰시였다. 그녀는 병들어 가는 헤밍웨이를 돌봤고, 『노인과 바다』(1952)의 완성을 지켜봤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뮤즈들과 함께 탄생한 영감의 기록물이었던 셈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속 헤밍웨이
이렇게 20세기 전쟁사와 여인들을 따라 작가의 신화를 정리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영화라는 필터는 신화적 인물들을 관객들에게 다소의 거리를 두고 보여준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헤밍웨이가 잠깐씩 등장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연인과 함께 파리에 온 소설 지망생 ‘길’이다. 자정 무렵 갑자기 등장한 구형 푸조 자동차에 올라타게 된 그는 꿈에 그리던 과거의 파리를 만나게 된다. 20년대의 파리는 미국인 예술가들의 천국이었다. 길은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난다. 미국인 실비아 비치가 영어 도서 전문 대여점 겸 출판사인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연 것도 이 무렵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가 은근히 참고하고 있는 것이 바로 헤밍웨이의 에세이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밥값을 빌리는 젊은 작가 헤밍웨이의 파리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나 문학적 교감을 나누기도 하고, 주변의 예술가 친구들과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원제는 ‘이동축제(A Moveable Feast)’인데, 이 말은 부활절처럼 특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은 휴일을 가리키는 교회 용어다. 조금은 배고픈 예술가이던, 파리의 센 강 좌편에 거주했던 시절을 ‘축제’ 기간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불확실하지만 미래를 향한 기대감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다큐멘터리 촬영도
헤밍웨이를 묘사하는 또 다른 영화는 ‘헤밍웨이와 겔혼’이다. 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세 번째 부인 겔혼은 마이애미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난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영화화로 인해 헤밍웨이는 커다란 명성을 누리게 됐지만, 그는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36년 스페인내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헤밍웨이는 네덜란드의 다큐멘터리 감독 요리스 이벤스와 함께 스페인 내전을 찍기로 결정한다. 영화를 통해 프랑코가 아니라 스페인 민중이 승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엔 ‘시민 케인’의 감독 오손 웰즈에게 내레이션을 부탁했지만 다툼으로 인해 헤밍웨이가 직접 마이크를 잡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스페인의 대지’는 이벤스와 헤밍웨이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합작품이다.

‘헤밍웨이와 겔혼’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겔혼이 포화가 퍼붓는 한가운데서 아랑곳하지 않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한 예술가를 목격하는 대목이다. 인간에 대한 열정과 개인의 집착 그리고 정력적인 태도가 수많은 글자를 써내려가게 했고, 헤밍웨이를 20세기의 작가 중 앞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헤밍웨이는 인간 카메라였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사건의 중심에서 거리를 두고 초연해서 문학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20세기를 넘겨 헤밍웨이가 남긴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쟁이나 바다 한가운데의 광풍 속에서도 상처입기 쉬운 영혼을 붙잡는 집요함이 느껴진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등장하는 기도문은 이와 같은 영혼의 표현이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그만큼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그대’를 위해 두드린 타이프가 남긴 헤밍웨이의 글은 인류에게 위로와 행운이 되었다. 그의 시대와 삶은 복잡했지만 그가 써내려간 것들은 언제나 보편적인 명쾌함을 향하고 있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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