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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고단함 싹 풀어주는 수백년 전 漢詩

중앙선데이 2014.11.08 03:50 400호 32면 지면보기
저자: 안대회 출판사: 태학사 가격:1만2000원
“세금을 납부하라 너무 시달려 / 견디다 못 견뎌서 집을 팔았네”로 시작되는 시가 있다. 공감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요즘 시가 아니다. 정조·순조 시대 사람 장혼(1759~1828)의 시다.

『새벽 한시』

바람을 읊고 달빛을 희롱하는 음풍농월, 전원의 여유를 노래하고 산수의 멋을 자랑하는 목가, 술기운과 춤사위, 회고풍과 감상풍.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시(漢詩)’의 특징들이다. 그런데 한문학자 안대회가 엄선한 100편의 한시에는 그런 게 없다. 한시가 과거의 향수나 자극하는 낡고 무감각한 문학이 아니기에 이런 시들을 애써 배제했다고 한다.

그럼 한시의 본모습은 뭘까? 저자에 따르면 20세기 이후의 문학과 차별되는 독특한 감각으로 세상과 인생을 다채롭고 폭넓게 표현해낸 문학이 한시다. 몇백 년 전을 살았던 사람들이 쓴 시지만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결함의 세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흠 많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은 것이 『새벽 한시』에 엮인 100편이다. 그래서 여기엔 시대를 초월한 소시민의 삶이 오롯하다. 세상 풍파에 찌든 일상을 살고 있지만, 철 따라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의 이치에서 인생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지긋한 시선들이다.

“팔딱팔딱 날아갈 듯 기운이 몹시 세어 … 앞으로만 나가고 물러서지 못하나니 / 넓은 바다 푸른 파도는 영영 가지 못하리라”(안축·1282~1348).

한사코 상류로 오르려는 송어의 억센 욕망은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자유를 빼앗고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뛰어오를 힘이 있어도 뒤로 한발 물러서는 태도가 추락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다.

“허둥지둥 달려온 마흔여섯 세월 거친 꿈은 아직 식지 않았는데 … 강호의 곳곳은 아우들이 차지하고 비바람 속 벗들은 곁을 떠난다/ 남산의 달빛 아래 홀로 섰더니 고목 가지엔 거미가 줄을 치고 있다”(황오·1816~?)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중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남자의 허전한 심사도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하지만 그런 허전함을 훌훌 털어내는 것도 소시민들의 몫이다.

“누가 우리 살림살이 가난하다더냐? 봄 되면 모든 것이 기이한 것을 / 산에서는 붉은 비단 병풍을 치고 하늘은 푸른 비단 휘장을 친다 … 옛 책을 읽는 것이 으뜸가는 멋 그 좋다는 고기 맛도 잊어버린다”(김성일·1538~1593).

“중년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오니 작은 집은 앞 들녘을 내려다보네 … 산 스님은 산나물을 한 움큼 나눠주고 개울가 노인은 물고기를 한 바구니 보내네 / 그 풍미에 나는 사뭇 만족하노니 귀한 음식 부러워한 적 언제 있었나?”(김이만·1683~1758)

화려한 현역생활이 끝나간다고 초조해 할 필요 없다. 은퇴 후 잠시 공허함과 우울함도 찾아오겠지만 금방 괜찮아진다. 물리게 먹던 고기 맛보다 책 읽는 맛을 새롭게 알게 되고, 잊고 지내던 고향의 풍미와 인심을 새삼 깨닫게 되니 말이다.

이렇게 보니 한시란 우리 시대의 고품격 힐링 아이템이다. 촌스럽게 희망과 절망 따위 입에 담지 않고도 세상을 버텨나갈 힌트를 스스로 얻고, 몸과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저절로 알게 하는 것. 그게 한시의 참모습이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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