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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한 사회, 정의롭지 못하다" 스무 살의 분노

중앙일보 2014.11.08 14:01
2015 대학수학능력시험까지 나흘 남았다. 하지만 아직도 지난해 수능의 여파는 그대로다. ‘세계지리 8번’ 오류 사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청춘의 1년을 날린 열아홉 살 청년은 “내겐 잘못이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고, 차선책을 선택해야 했던 또 다른 이는 “배신감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수능 세계지리 8번 문제 오류 논란
"소송한 이유는 평가원이 괘씸해서"
"내 잘못 없는데 피해봐 억울하다"며 소송
특별법도 "구제 최소화하는 구제책" 비판

지난해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 지역 경제 협력체인 EU와 나프타(NAFTA)에 대해 옳은 설명만 모두 고르는 3점짜리 문제다. <보기> 중 ㄷ문항이 걸렸다. “EU는 나프타보다 총생산액의 규모가 크다”는 건데, 실제로 2012년 기준 EU의 총생산액은 나프타보다 2조가량 적다. 하지만 ㄷ문항을 빼곤 찍을 수 있는 답이 없었다. 수험생들은 “출제오류”라고 주장했고, 평가원은 “EBS 교재(여기엔 EU 총생산액이 나프타보다 많은 것으로 나와있다)를 토대로 출제해 문제없다. ㄷ이 포함된 2번이 정답”이라고 했다. 지난달 16일, 서울고법은 학생들의 손을 들어줬다. 교육부와 평가원은 상고를 포기하고 구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서울대 못 간 건 상관없다”



K대 영문과에 진학한 이모(20)씨는 세계지리 8번 문제를 틀렸다. 지난해 수능시험이 끝나고 대입 컨설팅 업체로부터 “평가원이 세계지리 8번을 오류처리 한다는 가정 하에 서울대도 노려볼 수 있다”는 조언을 받았다고 했다. 너무도 명확한 문제 오류였기 때문에 늘 그랬듯 당연히 시정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류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씨는 그 때를 떠올리며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기껏해야 3점짜리 문제 하나로 당락이 바뀌었겠느냐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수험생 입장에선 누구나 안정적인 곳을 선택하기 마련이다”고 했다. “세계지리 8번이 오답 처리가 되는 순간, 나는 정시 (나)군에서 서울대를 포기하고 성균관대를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결국 K대에 들어갔다. 1년 동안 다녀보니 학교 생활도 마음에 들고 딱히 후회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소송에 참여했다. “평가원의 안일한 태도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가원과 교육부가 내놓은 특별법도 싹 뜯어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향 지원한 학생에 대해 구제책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수험생들의 지원 심리를 파악했다면 하향 지원 학생에 대해 고려를 안 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정시지원자들을 구제하기도 힘들 거라고 내다봤다. “원점수 3점을 올려준다곤 했지만 표준점수 및 백분위로 계산하면 실질적으론 1.5점 정도 올라가는 셈이다. 모두가 동반 상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분율이나 등급도 거의 오르지 않는다. 더구나 해당 학생이 수능성적으로 떨어졌는지 논술로 떨어졌는지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실질적인 구제가 안 된다. 해결책을 만들기 위한 해결책일 뿐이다.” 이씨의 말이다.



“K대에 정보공개 청구할 것”



박모(19)씨는 이씨가 진학한 K대 영문과에 불합격한 ‘또 다른 피해자’다. 그는 지난 수능에서 세계지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사회탐구영역에서 ‘한국사’와 ‘윤리와 사상’ 시험을 쳤다. 박씨가 최종적으로 받은 건 ‘K대 영문과 예비 6번’이라는 번호였다. 자신보다 앞에 있던 예비 1~5번 학생은 모두 합격했다. 처음부터 K대 영문과를 목표로 공부를 한 박씨는 올해도 이 학교에 가기 위해 재수를 택했다.



박씨는 “세계지리 문제오류가 나의 탈락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K대의 경우 사회탐구영역에서 표준점수 대신 백분율(해당 과목을 본 수험생 가운데 몇 퍼센트 안에 성적이 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을 가져다 쓴다. 박씨는 “만일 예비 1~5번 학생 가운데 세계지리를 선택하고 8번을 맞힌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은 백분율 점수가 나보다 낮아져 당락이 뒤바뀌었을 수 있다”고 했다. 일찌감치 8번 문제가 오류로 처리됐다면 정답자를 제외한 모든 세계지리 선택 학생의 원점수가 3점씩 올라간다. 당연히 만점자 수도 늘어나고 상위권의 백분율도 그만큼 낮아지기 때문에 예비 번호 자체가 달라졌을 거란 게 박씨의 설명이다. 만일 합격자 가운데 세계지리 오류가 인정돼 누군가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면, 예비 합격 자리가 하나 더 늘었을 수도 있다고도 했다.



“통상 K대 영문과가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봐야 할 정도로 커트라인이 치열하진 않았다는데, 작년엔 유난히 경쟁이 치열했다”고 했다. 박씨는 “공부를 못해서 떨어진 거라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니까 정말 황당하다”며 “국내 대학 입시 자체가 연쇄적이지 않나. 누군가 다른 데 붙으면 자리가 비고, 대기 중이던 학생은 추가로 합격하고… 이런 점까지 고려하면 나 같은 피해자도 상당수일 것”이라고 했다. 박씨는 해당 대학에 관련 정보 공개를 청구하고, 합격 가능성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평가원에 금전적인 피해 보상도 요구할 거라고 말했다.



“그때가 골든타임이었다”



지난해 세계지리 시험을 본 수험생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저학년 때 2002 월드컵을 겪었다.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세계를 배웠고, 호기심에 지구본을 돌려보며 세계지리에 재미와 흥미를 느낀 아이들이다. 사회탐구영역 응시 학생 가운데 10% 정도가 선택하는 ‘소수 과목’이지만, ‘세계지리 오타쿠(한 분야에 깊이 몰두하는 사람을 일컫는 일본어)’가 몰리기 때문에 결코 만만한 과목은 아니다. 신모(20·여)씨 역시도 세계지리는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 당연히 만점이라고 봤지만 결과는 47점, 2등급이었다.



신씨는 8번을 제외한 모든 문항을 맞혔다. 지방의 비평준화 학교를 다녀서 내신이 불리했던 신씨는 우선선발전형(최소 3개 과목서 도합 4등급 이내에 든 뒤 논술로 평가)을 노렸다. 세계지리 8번 문제 오류만 빨리 시정됐어도 신씨가 유리했겠지만, 오답 처리가 되면서 등급이 밀렸다. 결국 신씨는 하향지원을 했다.



신씨의 어머니는 “수능이 끝난 직후가 골든타임이었다”고 했다. 이제와 정부에서 구제책을 마련하곤 있지만, 때를 놓치는 바람에 피해 학생들이 입은 상처는 치유될 수 없게 됐다는 거다. 당시 대형 로펌을 동원하는 평가원의 모습을 보고 아이는 “수능이 다 실력이라지만, 이것(운)도 실력인가보다”며 체념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세상 사는 게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더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오류 사태 초기부터 소송에 나선 세계지리 학원 강사 박대훈씨는 “틀린 걸 틀렸다고 하지 못한 어른들의 태도 때문에 제자들이 피해를 봤다”며 적극적으로 문제를 알려왔다. “지난 1년동안 교육부와 평가원이 아이들을 향해 법적으로 맞선 것도 속이 상했다”고도 했다. 요즘도 박씨의 메일함에는 묻혀있던 피해 학생들의 사연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몇몇 대학생들은 직접 자료를 모아다가 엑셀을 돌려 8번 오류 문제에 따른 점수 조정 시뮬레이션 자료까지 냈다. 통계를 낸 양현일(고려대)씨는 "특히 정시모집에서 중상위권 대학 지원자들의 피해가 가장 크고, 2등급~5등급 사이에선 표준점수는 2점, 백분위는 7% 안팎의 큰 손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함께 이 문제를 추적한 김용욱(서강대)씨도 "세계지리를 선택하지 않은 사회탐구영역 응시자 중에도 잠재적인 피해자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유재연 기자 que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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