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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대중의 눈을 조종하라, 디자인 마술 100년

중앙일보 2014.11.08 00:07 종합 23면 지면보기
바이 디자인

데얀 수직 지음

이재경 옮김, 홍시

640쪽, 1만6000원




상투적이다.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의 사전을 차용한 책이라니. 하지만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니 반전이다. 지퍼·볼펜은 물론 자동차·건축물까지 다양한 디자인 걸작 이야기를, 30년간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그리고 신랄한 비평을 함께 녹여낸 솜씨가 일급이다. 세계적인 건축·디자인 잡지 ‘도무스’ 편집장을 거치고 현재 런던 디자인뮤지엄 관장인 데얀 수직이 쓴 디자인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디자인·건축·테크놀로지·패션·예술이 얽히며 발전한 지난 100년을 알파벳 순으로 키워드를 짚어가며 다룬다. A부터 열어보자. ‘진본성’(Authenticity)을 주제로 한 글에서 저자는 “디자인은 남의 감정을 조종하려는 시도를 빼면 시체”라며 그래픽 디자인을 예로 든다. 오바마 대선 캠프가 두 번의 선거에서 왜 고담(Gotham) 볼드체를 선택했는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① 미국 소설가 잭 케루악(1922~69)은 소설 『길 위에서』를 쓸 때 종이를 길게 붙여 36m짜리 타자 용지를 만들고 쉼없이 써내려 갔다. ② 스웨덴 가구업체 이케아는 세계 가정집 풍경을 바꿔놓았다. ③ 영국 로터스 자동차는 1940년대 말 내핍경제 시대에 절약정신으로 빚은 작품이었다. ④ 클립·지퍼·포크·쪽가위는 군더더기 없다. [그림 홍시]
 본래 남성 패션지 ‘GQ’ 미국판 의뢰를 받아 만들어진 고담체는 “새로운 글꼴이지만 어딘지 익숙하고, 자기 주장이 있지만 위압감은 없고, 친밀하지만 촌스럽지 않으며, 당당하지만 잘난 척하지 않는 정직한 톤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 ‘믿음직스러운’ 글꼴을 스타벅스도 채택했는데 효과는 다르다. 글꼴은 옷과 같아서 옷 입는 사람의 성격에 어울려야 힘을 발휘한다는 설명이다.



 어떤 주제든 이야기 갈피마다 저자가 오래 지켜봐 온 디자이너와 건축가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담아놓은 것도 매력이다.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론 아라드(63)도 그 중 하나다. 아라드는 런던 AA건축학교 졸업 후 건축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어느 날 점심 먹으러 나왔다가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렇게 직장을 때려치운 아라드는 바로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의자를 만들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렸다고 한다. 고물가게에 버려진 자동차에서 가죽 의자 두 개를 뜯어냈는데, 여기서 그의 첫 작품 ‘로버 체어’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아라드는) 기성품마저도 자신의 강력한 테마로 삼을 줄 알았다”며 “예술과 건축·디자인의 경계를 명민하게 넘나드는 게 그의 힘”이라고 말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61)에 대해서는 “난잡한 조형의 광풍에 휩쓸리지 않는” 냉철한 건축가라고 평했다. 특별히 ‘K’의 한 부분을 할애해 체코 출신 건축가 얀 카플리츠키(1937~2009)를 소개한 대목에선 진심 어린 찬사와 애틋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미래주의 설계를 꿈꿔온 카플리츠키는 고향을 떠난 지 40년 만에 프라하 국립 도서관 설계에 당선됐는데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하고 200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유독 렘 콜하스에 대해서는 까칠한 시선이 두드러진다. 지은이는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요란한 저작활동으로 뜨는 법 하나는 확실히 이어받았다”며 “건축계에서는 그를 위대한 사상가로 대우하지만 그의 명성은 노출과잉시 사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꼬집었다.



 ‘수집’과 ‘취향’ ‘비완벽’에 대한 주제부터 요즘 세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세계화 정책(‘뮤지엄’)까지 종횡무진하는 이 책은 건축과 디자인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분명 반가운 성찬이다. 정보는 깊이와 밀도를 두루 갖췄고,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도 읽는 이의 생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저자는 자동차를 ‘산업문화의 최고봉’으로 꼽았다. 자동차를 자세히 뜯어보면 우리가 사는 방식, 만드는 방식,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이 보인다고 했다. 그가 일상의 사물과 공간에 집착하고 관찰해온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물과 공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게 결국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그는 말한다.





[S BOX] 시트로엥과 보잉 747의 매력



프랑스 문화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시트로엥 DS의 아름다움에 반한 일로 유명하다. 1955년 프랑스에서 시트로엥 DS가 출시됐을 때 혁신적인 디자인에 반한 바르트는 DS가 다른 행성에서 홀연히 나타난 물건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DS의 미끈함은 인간의 손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완벽의 산물로 보인 것이다. 바르트는 그의 책 『신화론』에서 DS를 중세 고딕 대성당에 맞먹는 작품으로 치켜세웠으며, 샤르트르 대성당을 지은 중세의 석공들이 현대에 태어났더라면, 그 창의력을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발휘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시트로엥 DS에 매혹된 바르트가 있었다면, 보잉 747에게는 거킨빌딩과 런던시청을 설계한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있다. BBC가 포스터에게 ‘가장 좋아하는 20세기 건축물’을 골라 영상물을 제작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주저 없이 점보제트기에 바치는 기록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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