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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잃는 상황, 상상도 하기 싫었다”

중앙일보 2014.11.08 00:05



[매거진M] ‘현기증’ 송일국 인터뷰









불행은 멀리 있지 않다. ‘현기증’(11월 6일 개봉, 이돈구 감독)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이다. ‘현기증’은 영희(도지원)와 상호(송일국) 부부가 불의의 사고로 아기를 잃게 된 후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부문에 초청돼 주목받았다. 영화에서 송일국(43)이 연기한 상호는 엄청난 비극에 직면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삶의 생채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늘 멋지고 든든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구축해 온 그가 초라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얼굴이 낯설지만은 않다.





-영화는 오랜만이다.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이돈구 감독의 전작 ‘가시꽃’(2013)을 보고 반했다. ‘대단한 영화가 나왔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돈구 감독의 영화라면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기회가 닿아 참여하게 됐다.”





-시나리오를 읽은 소감은.



“솔직히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이야기도 무겁고 불편했다. 아기를 잃게 된다는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더라. 하지만 배우로서 연기해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이 영화 출연 전에 1년 가까이 공백이 있어서 연기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촬영을 마치고 갈증이 채워진 것 같나.



“물론이다. 이돈구 감독은 배우의 잠재된 모습을 끄집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가시꽃’의 주인공은 극 중에서 찌질하고 성격도 소극적인데, 실제 배우(남연우)를 만나 보니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더라. 배우가 가진 내면의 다른 모습을 끄집어 낸 감독의 역량인 것이다. 나 역시 상호 같은 역할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대개 주인공을 맡아 왔는데, 이번에는 조연인 데다 비중도 크지 않다. 상호는 비록 작은 역할이지만 내 연기 인생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사실 그동안 영화계에서 ‘송일국은 영화를 안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들었다. 제작사에서 배우를 캐스팅할 때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현기증’을 보고 난 영화 관계자들이 영화 속 모습을 보고 놀랐다는 반응이 있었고, 덕분에 차기작 ‘타투이스트’(이서 감독)와 ‘플라이 하이’(한경탁 감독)까지 잇따라 캐스팅 됐다. ‘현기증’은 배우 송일국의 새로운 시작점인 셈이다.”





-송일국 하면 드라마 ‘주몽’(2006, MBC)이나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2010, MBC)에서처럼 영웅적인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평범하고 무기력한 역할로 나온다.



“사실 이돈구 감독도 내가 캐스팅되는 걸 기대 안 했다고 하더라.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나한테 제안했는데, 내가 출연하겠다고 하니 처음엔 의아해 했다(웃음). 상호 역은 내게 도전적인 캐릭터였다.”





-이번 영화를 위해 새롭게 시도한 것이 있다면.



“작품하면서 처음으로 역할을 위해 뭔가를 가미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머리카락도 부스스하게 놔뒀다. 사실 메이크업도 안 하려고 했는데, 여배우들과 톤을 맞춰야 해서 살짝 했다(웃음). 그리고 일부러 살도 찌웠다.”





-상호의 장모인 순임(김영애)이 아기를 목욕시키다 불의의 사고가 발생한다. 사고 이후 착잡해 하던 상호가 유흥주점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하고 난 뒤 죄책감에 오열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던데.



“그 장면은 정말 답이 안 나오더라.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맥주 여섯 캔을 한 번에 마시고 촬영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연기했던 것 같다.”





-영화를 찍고 난 뒤에 후유증 같은 건 없었나.



“트라우마 같은 게 생겼다. 아기를 목욕시킬 때 잠시도 한눈 팔지 못하겠더라.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이다. 특히 김영애 선배는 더 큰 후유증에 시달렸다.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던 날,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엄청 우시더라. 정말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지원과는 첫 호흡인데.



“도지원 선배는 처음에는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나하고 코드가 비슷하더라. 푼수끼도 많고, 정도 많다. 영화의 내용은 무겁고 어두웠지만 현장 분위기는 굉장히 밝았다.”





-차기작 ‘플라이 하이’와 ‘타투이스트’에서는 어떤 역할인가.



“‘플라이 하이’에서는 삼류 건달로 나온다.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사는 인물이다. 아마 영화를 보면 놀랄 수도 있다. 하하. ‘타투이스트’에서는 연쇄살인범 역할을 맡았다. 평소에 고급차를 털고 다니는 인물이다. 연기하면서 처음으로 정사신도 찍었다. 두 영화를 촬영하면서 ‘나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연극 ‘나는 너다’에서는 1인 2역을 연기하는데.



“안중근과 그의 아들 안준생의 이야기다. 아들의 시점에서 바라본 안중근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사실 2010년에 초연한 ‘나는 너다’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몇몇 사람들이 ‘또 영웅이냐’라는 말을 했는데, 아마 연극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안중근의 영웅적인 모습도 있지만, 아들 안준생의 나약한 모습도 있다. 연극 ‘나는 너다’는 배우로서의 꿈인 뮤지컬 무대에 오르기 위한 과정이다.”





-최근 활동이 많아지면서 삼둥이(송일국의 세 쌍둥이 아들 대한·민국·만세)와 보내는 시간이 줄지 않았나.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려면 어쩔 수 없다(웃음). 사실 아내가 버는 돈으로 아기들 보모비와 관리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더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 하하.”





-앞으로 영화에서 자주 만나면 좋겠다.



“나도 제발 그러길 바란다. 드라마는 꽤 많이 출연했지만, 영화는 ‘현기증’이 세 번째다. 배우가 되면서 늘 영화를 꿈꿔왔지만 생각만큼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현기증’을 통해 다시 조명받게 되면 좋겠다. 앞으로 시나리오도 많이 받고 싶다(웃음).”





글= 지용진 매거진M 기자

사진= 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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