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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타인의 선택 이끄는 ‘넛지’의 힘

중앙일보 2014.11.07 00:03 경제 5면 지면보기
마이클 리드 피델리티 자산운용 대표
지난해 한 향균비누 제조회사에서 ‘세균 스탬프(THE GERM STAMP)’라는 캠페인을 열었다. 여러 질병에 노출된 필리핀 아이들에게 손 씻는 습관을 길러줌으로써 위생 수준을 높이는 게 목표였다. 아침마다 선생님들이 등교한 학생들의 손에 세균 모양의 스탬프를 찍어주고,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손에 찍힌 세균 스탬프를 지워야 했다. 놀랍게도 캠페인이 시작된지 한 달 만에 아이들의 손 씻는 횟수가 평균 71% 늘었다.

 이 캠페인은 인위적인 방법 대신 자연스럽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아이들의 행동을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넛지(Nudge)’ 마케팅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팔꿈치를 쿡쿡 찌르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 넛지는 2008년 『넛지: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이라는 책에서 처음 소개된 이후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라는 뜻의 행동경제학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탈러는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하는데 그 중 초기단계 넛지가 특히 주목 할만 하다. 리처드 탈러는 사람들은 설사 자신이 손해를 볼 지라도 당장의 귀찮음 때문에 지금 주어진 환경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본능을 역이용해서 처음부터 기본환경을 적절하게 설정한다면 사람들의 행동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기본설정(default)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흥미로운 통계자료가 있다. 바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장기기증률의 차이다. 사회·문화적으로 비슷한 두 나라지만, 국민들의 장기기증률은 오스트리아가 99%, 독일은 12%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인다. 이유는 시스템이다. 오스트리아는 사망자가 생전에 별도의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았을 경우 자동으로 장기 기증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 독일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기증을 원하는 사람에 한해 신청을 받고 있다. 초기 기본설정의 차이가 이런 차이를 부른 셈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서 초기 기본설정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는 미국의 퇴직연금 제도인 401(k)다. 세금공제 등 혜택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중반까지 미국 근로자들의 401(k) 가입률은 30% 수준에 머물렀다. 대책을 모색하던 정부는 근로자들이 퇴직연금 가입에 필요한 복잡한 서류작성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2006년부터는 근로자가 회사에 입사하면 자동으로 401(k)에 가입하도록 정책을 바꿨다. 이후 근로자들의 가입률은 점차 증가해 2012년 70%를 기록했다. 이 정책은 지금까지도 성공적인 퇴직연금 활성화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 퇴직연금 제도에서 또 다른 넛지의 사례는 바로 ‘점진적 저축 증대(Save More Tomorrow)’다. 누구나 은퇴준비의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당장 생활비를 줄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저축을 늘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기업은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 근로자의 봉급이 인상되면 퇴직연금 납입액이 자동으로 늘어나도록 했다. 프로그램 시행 초기 조사결과에 따르면, 약 3년4개월 동안 이 제도를 시행한 기업 근로자는 다른 근로자에 비해 월급 중 퇴직연금 납입액 비중이 4배 이상 높았다. 점진적 저축 증대 제도는 현재 피델리티를 포함한 미국 내 대부분 운용사들이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성공적으로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면서 많은 국가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401(k)를 통해 국민들이 안정적으로 노후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미국 증시의 부흥을 이끌며 일석 이조의 효과를 냈다. 이런 성공의 배경에는 넛지의 힘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은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국민연금 외에도 퇴직연금·개인연금 가입자가 늘고 있다. 정부 역시 세금공제 등 다양한 혜택을 만들어 장려하고 있다. 눈앞의 당근으로 은퇴준비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다소 느리더라도 장애물이 없는 안전한 길을 만들어 그 길을 누구나 자연스럽게 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도 동반돼야 한다. 초기의 기본설정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마이클 리드 피델리티 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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