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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독재 준엄히 꾸짖으시더니…|정일형 선배 영전에

중앙일보 1982.04.24 00:00 종합 6면 지면보기
나라가 아직 태평치 못하고 민주주의가 미처 정착이 안됐으며 선배님이 그토록 몽매에도 잊지 못하시던 통일의 실마리 또한 풀리지 않은 이때 이 땅과 이 민족을 두고 어찌 선배님부터 먼저 가실 수 있읍니까.

정일형 선배님…그저 계시는 것만으로도 저희 후배 야당인들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어주신 정일형 선배님, 그토록 아껴 주시고 북돋워주시던 저희들을 남겨두시고 그냥 가시다니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통곡을 참을 길 없읍니다.

78개 성상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직 이 나라의 통일과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ㅇㄹ 위하여 외길을 걸어오신 선배님이야말로 진정 이 나라 정치인의 산귀감이셨습니다. 분단의 비극을 보신 후로는 한시라도 정치인으로서의 일언일동에 통일을 생각하시지 않음이 없으셨고 독재를 맞아서는 언제나 감연한 투쟁의 선봉에 나섰읍니다.

부의를 꾸짖고 부정을 배척하셨으며 부패를 보시고는 준열한 질정의 말씀을 안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세인들이나 저희 후배들은 선배님을 「대쪽 같은 분」이라 하여 존경하고 따르지 않았읍니까.

공인으로서의 자세와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는 그토록 분명하고 엄격하셨지만 선배님은 늘 자애롭고 인정많은 분이셨던 것도 저희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래 몸에 밴 종교인으로서의 희생과 봉사와 성실이 주변을 늘 훈훈하고 따뜻하게 감싸주셨고 각박한 야당의 정치활동 가운데서도 항상 일말의 훈기가 선배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읍니까.

어느 후배나 수하사람에게도 평소 각박한 말씀 한마디 못하시면서도 권력의 횡포나 집권당의 독주에 대해서는 언제나 추상열일로 꾸짖으셨읍니다.

60년대엔 굴욕적인 한일외교를 반대하다 의원직을 헌신짝처럼 버리신 일이며, 이른바 유신시절에는 의정단상에서 대통령 하야를 권고하는 가슴 서늘한 발언을 태연히 하시어 속기록이 삭제되고 놀란 집권자들이 어쩔줄 몰라 한 일이 어제처럼 눈에 선합니다. 그러시다가 마침내 명동사건이란 굴레로 의원직을 박탈당하시지 않았읍니까.

오늘날 야당의 맥을 잇는 민한당이 창당될 당시 선배님은 그때 이미 병상에 계셨읍니다만 문병간 저에게 『만취가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일을 맡았군. 잘해줘. 잘해 줄줄 믿네』라고 격려해주시던 선배님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그러나 정 선배님이시여! 민주주의를 향한 선배님의 그 불굴의 용기와 탁발한 경륜은 지난 세월뿐만 아니라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필요하고 더 소중한 현실입니다. 그런 터에 이렇게 저희들을 두신 채 그냥 가시다니 이 슬픔, 이 공동을 어떻게 하겠읍니까.

그렇지만 저희 야당 후배들이 대선배를 잃은 슬픔에만 젖어 있어서야 선배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8선의 최다선 원로로서 상대가 그 누구든 독선 부패하면 맨 앞장에 나가 싸우신 선배님의 뜻을 이어 받아 못다 이루신 유업을 성취하는 것이 선배님의 뜻임을 저희들은 잘 알고 열과 성을 다할 것임을 선배님의 영전에 맹세합니다.

정 선배님이시여!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민한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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