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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한국 기업의 예술 지원 ‘은밀하게 위대하게’

중앙선데이 2014.11.02 01:49 399호 24면 지면보기
영국 테이트 미술관이 새로 취득한 백남준의 작품 9점을 3일부터 전시한다. 그의 작품이 테이트의 소장품으로서 ‘현대미술의 심장부’라는 런던 테이트 모던에 전시되는 건 처음이다.

메세나의 진화

여기엔 현대자동차의 후원이 있었다. 현대차는 올해 초 테이트와 2015~2025년 장기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백미는 본래 화력발전소였던 테이트 모던의 거대한 터빈 홀에 매년 세계 주요 작가 중 한 명이 ‘장소특정적’ 작품을 제작해 전시하도록 지원하는 ‘현대 커미션’이다.

현대차의 지원으로 테이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백남준의 ‘베이클라이트 로봇’(2009).
현대차는 국립현대미술관과도 비슷한 장기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지금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작가 이불의 대형 설치미술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제1탄이다. 한국 작가 중에 경력을 많이 쌓았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중진 작가(주로 연령 50대)를 매년 한 명씩 10년 동안 선발해 개인전을 하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BBC의 미술 에디터 윌 곰퍼츠는 테이트의 ‘현대 커미션’ 발표 후에 이런 말을 했다. 10년 넘게 장기 계약으로 예술 후원을 하는 건 매우 드물고 리스크가 크다고. 기업이 기대하는 만큼의 브랜드 이미지 상승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현대차는 리스크를 감수하며 상당히 공격적인 행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현대차는 두드러진 미술 후원 프로그램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다수의 대기업들이 10년 넘게 자체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말이다.

호기심이 일어나 현대차 관계자에게 질문하니 “좋은 모델 하나 연구개발을 하는 데 최소 5년이 걸리는 자동차 비즈니스의 특성상 우리는 장기 사이클로 움직인다”고 답했다. 또 “결국 미술관을 세우지 않겠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자체 미술관을 세우기보다 세계 각지의 기존 주요 미술관들과 장기 파트너십을 늘려나갈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아트 컬렉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향후 10년간의 세계 미술사를 새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결정은 결국 그 시장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토양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또한 한국에 기반을 둔 기업으로서 서구에 치우친 세계 미술사에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이 말을 듣고 놀랐다. 한국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이 이렇게 야심 찬 큰 그림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대차는 곰퍼츠가 우려한 브랜드 이미지 상승 효과보다 더 크고 장기적인 눈으로 미술 후원 프로그램을 세우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현대차의 야심이 실현될지는 몇십 년 후에 봐야 알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단기 성과에 급급하다는 지적이 많은 상황에서 이렇게 장기적 목적으로 예술 후원을 한다는 것 그 자체로 신선하고 고무적이다. 또한 중구난방으로 후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의 융합적 성격과 가장 잘 맞는다”는 생각으로 현대미술에 집중하는 것도.

현대차 외에도 세련된 메세나 활동을 하는 국내 기업이 늘고 있다. ‘세련’의 기준은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기업 정체성에 어울리는 문화예술 후원에 특화하는 것, 또 단기적인 생색내기용이나 마케팅과 직접 관련된 전략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간접적으로 문화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것, 즉 ‘은밀하게 위대하게’ 하는 것이다.

최근에 가장 은밀한 케이스를 하나 알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아모레퍼시픽이 운영하는 오설록 티하우스가 있는데, 북촌길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좋은 위치에 있다. 그러나 회사는 이 카페로 전혀 이익을 보지 않는다. 카페의 매출 중 비용을 제외한 순익을 고스란히 미술관에 기부하고 있고, 이를 선전하지도 않는다. 나 또한 미술관 간부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몰랐었다. ‘메세나’란 단어가 처음 유행한 지 20년이 흐른 지금, 한국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은 여전히 갈 길이 많이 남았지만 이제 많이 세련되어졌다는 느낌이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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