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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보여주되 말하지 않는 김훈 … ‘펜의 노래’엔 울림이 있다

중앙선데이 2014.11.02 02:10 399호 26면 지면보기
김훈은 쓴다. 아니면 달린다. 그의 작업실 책상 앞에는 ‘하루에 원고지 다섯 장은 꼭 쓰자’는 의미의 ‘필일오(必日五)’라는 말이 적혀 있다. [중앙포토]
내가 입사하던 1980년대 초 신문산업은 호황기였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신문 부수는 날로 늘어났다. 월급도 대기업보다 많았다. 전국지는 조·석간 합쳐 6개뿐. 지금처럼 인터넷을 포함해 수백 개 언론사가 난립하는 시절과는 달랐다. 200명 가까운 기자가 매일 12면을 제작하니 정성도 대단했다.

<15> 우리 시대의 ‘대문장가’

문제는 언론 자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는 보도되지 못했고 담당 기자나 간부는 기관에 끌려가 ‘봉변’을 당했다.

초년병 시절부터 우리는 사실(fact)과 의견(opinion)을 명확히 구분해 쓸 것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화창한 날씨’는 객관적 사실이지만 ‘상쾌한 날씨’는 주관적 의견이다.

군사 독재하에서 우리는 의견은 줄이고, 사실만 보도할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마저도 문제될 수 있었다. 고위 공직자 수뢰사건이 정권에 불리하다며 보도 금지가 되고, 부동산 사기 피해자 중에 ‘장군 부인’이 포함된 기사가 나갔다고 군인들이 편집국에 난입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목격했다.

당국의 검열을 피하면서 국민에게 사실과 정보를 알려주려면 기자들이 ‘언어의 마술사’가 돼야 했다. 용어나 형용사·부사는 물론 조사까지도 의미를 담아 선택했다. ‘민감한 상황’을 보도할 때 선배들은 흔히 이렇게 주문했다. “사설 쓰듯 하지 말고 스케치하듯 보여줘(Show, Don’t tell).”

기자가 심판자가 돼 상황을 말하거나 의미 부여 하지 말고, 관찰자 입장에서 그대로 묘사해주고,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게끔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이런 기사 중 압권은 김대중 조선일보 출판국장(현 조선일보 고문)이 쓴 ‘거리의 편집자들’(1984.11.30)이었다.

‘낮 12시쯤의 광화문 지하도는 점심 먹으러 가는 사람, 먹고 나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로 시작되는 이 칼럼은 서슬 시퍼런 검열하에서 신문 가판원들이 톱기사는 무시한 채 1단짜리 ‘시국 관련 뉴스’에 빨간 줄을 그어 파는 모습을 소개하면서 당시 암울했던 언론 상황을 자조한 것이었다.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결국 정권 압력으로 2년 뒤 외유를 떠났다.

2002년 3월 6일자 기자협회보에 실린 한겨레신문 김훈 기자 인터뷰 사진. [사진 기자협회보]
오십 넘어 사건 기자로 취재현장에
김훈의 글을 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그는 ‘문학기행-명작의 무대’를 연재하고 있었다.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풍부한 감성, 현란한 수식어로 꽉 찬 그의 글은 매일 시국 사건과 검열 속에서 짧고 무미건조한 기사를 써야 하는 내 입장에선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理想鄕)같이 느껴졌다.

그는 기자라기보다 대(大)문장가 같았다. 글은 사실을 바탕으로 전개되나 항상 그의 의견(주관적 감정·판단)이 넘실대고 있었다. 그가 쓴 ‘김승옥의 무진기행(霧津紀行)’은 이렇게 시작된다.

‘…김승옥의 바다는, 때로는 카뮈의 에세이들이 그려내는 알제리의 바다처럼, 생(生)의 작렬감에 가득 찬 바다이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도시(都市=현실)와의 불화의 관계 위에 설정된 자폐(自閉)의 공간이다….’(1986.5.18)

질식할 듯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문학을 주제로 한 그의 글은 비교적 자유롭게 숨을 쉬며 원초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도 정권의 촉각을 곤두세울 만한 ‘불온한’ 생각은 영리하게 피해 기술했을 것이다.

그러던 김훈이 어느 날 지면에서 사라졌다. 89년인가 ‘조직과의 불화’로 16년 직장을 나와 버린 것이다.

90년대 민주화가 본격화되면서 언어는 고삐 풀린 말처럼 자유로워졌다. 온갖 주의·주장이 난무하고, 과거 하지 못했던 날 선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현장에는 살벌한 구호와 욕설, 폭로가 난무했다.

언론기관도 특유의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벗어나 주장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관찰자(observer)가 아닌 참여자(player)가 되기도 했다. 정파나 세력들은 이런 언론을 이용했다. 도움이 되면 박수를 쳤고, 불리하면 비난했다.

그동안 김훈은 프리랜서 작가, 주간지 편집장, 일간지 간부 등을 전전하다 2002년께 잠시 한겨레신문에서 말단 사건기자를 했다. 나이 오십이 넘어 신출내기들이 하는 경찰서 출입을 하다니…. 더구나 보수 성향의 그가 진보 신문에서.

그는 600자 분량의 ‘거리의 칼럼’을 연재했다. 그러나 넘치는 감정을 담아 자기 생각(의견)을 장황하게 펼치던 과거 김훈의 글이 아니었다. 감정은 절제돼 드라이해졌고, 상황(사실)을 간결하게 보여주기만 했다.

예컨대 ‘서울 인사동 술집 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언론인들이 몰려든다’로 시작되는 ‘라파엘의 집’(2002.3.28.)은 저마다 시국 걱정을 하면서도 정작 인근 어린이 보호시설은 외면해 결국 술집으로 바뀌는 서글픈 현실을 카메라로 비추듯 보여준다. 독자는 메시지를 금방 알아차린다. 전형적인 ‘Show, Don’t tell’식 기사다.

진보·보수 신문 모두에 쓴소리
김훈을 기자가 아닌, 소설가로 각인시켜 준 걸작 『칼의 노래』(2001년)도 마찬가지다. 수사적(修辭的) 장치는 전혀 동원하지 않고 주어와 동사, 문장의 뼈다귀만 갖고 썼다. 기자가 사실 보도하듯 말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된다. 당초 김훈은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를 놓고 선택에 고심했다고 한다. 전자는 객관적 상황 묘사요, 후자는 주관적 정서가 포함돼 있다. 마치 5공 시절 ‘경제가 좋다’와 ‘경제는 좋다’를 놓고 고민했던 경험과 비슷했다. 전자가 가치중립적이면서 긍정적인 반면 후자는 (경제 외) 다른 상황은 좋지 않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다.

왜 김훈은 ‘언론 자유’가 넘쳐 나는 시대에 도리어 혹독한 ‘자기 검열’을 하는가?

그의 작품들이 노무현 정권 들어 각광을 받게 된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 시절에는 사실보다 의견, 객관보다 주관, 이성(理性)보다 감정(感情)의 언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김훈의 글은 정반대였다.

그와는 고등학교·대학 선후배 관계로 공·사석에서 가끔 만났다. 2004년께인가 그는 신문기자이던 내게 말했다. “요즘 글쓰기가 어렵고, 신문·저널 읽기가 고통스럽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하고 뒤죽박죽으로 쓴다. 의견을 사실처럼, 사실을 의견처럼 말한다.”

그의 눈에는 2002년 일어난 ‘효순·미선 사망’ 사건이 명백히 ‘사고’인데 한쪽에서 ‘범죄’에다 반미주의로까지 몰고 간 것이었다.

어느 날에는 우리의 사고(思考)체계에 근본적 의문을 던졌다. “요즘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가?’ ‘왜 이런가’ 등의 과학적 사고 대신 ‘내 마음에 드나’ ‘내 생각과 맞나’ ‘내 편인가’식의 정서적·이념적·정치적 생각을 한다. 신념의 언어가 아니라 과학의 언어로 사유(思惟)해야 한다.”

술이 얼근히 들어가면 김훈은 그 큰 눈을 똑바로 뜨고 후배 기자들을 질책했다.

“지배적 언론이나 담론들이 당파성에 매몰돼 그것을 정의·신념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신념에 가득 찬 자들보다 의심에 가득 찬 자들을 신뢰한다.”

그는 진보성향의 신문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저널리즘으로 존재할지, 아니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존재할지를 고민하라”고 했으며, 반대편에 있는 보수성향의 신문에 대해선 “마치 자기네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오만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나는 그가 기자들에게 보낸 고언(苦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사실에 바탕해서 의견을 만들고, 의견에 바탕해서 신념을 만들고, 신념에 바탕해서 정의를 만들고, 정의에 바탕해서 지향점을 만들어라. 이게 갈 길이다.’

“입을 닫으니 마음이 들린다”
2000년대 중반 신문사를 나와 대학에서 가르칠 때, 나는 미국 컬럼비아대 교재인 ‘뉴스 보도(News & Reporting)’에서 ‘Show, Don’t tell’에 대한 설명을 발견했다.

“가장 감동적인 글은 필자가 말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당시 상황을 보여줄 때 나온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쓰고 나서 한 말이다….”

그러나 ‘Show, Don’t tell’이 단순히 글 쓰는 기술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강의 후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였다. 나보다 한 세대 어린 젊은이들과 진정한 소통은 ‘내가 말할 때보다 그들의 말을 들어줄 때’ 이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말을 하면 그들은 수동적이 된다. 그러나 내가 들으면 그들은 적극적이 된다. 나아가 마음의 문을 열고 호의적으로 나온다. 내가 한 일은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를 보여준 것(show)뿐이었다.

돌이켜 보면 세상살이 이치(理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보다 사소한 ‘마음’이나 ‘행동’에 더 감동을 받는다.

어렸을 적 시험을 망쳤을 때 어머니가 꾸지람 대신 사준 짜장면 한 그릇, 힘든 이등병 시절 고참이 다가와 말없이 건네준 담배 한 개비, 사건기자 당시 헤매는 나를 삼겹살집으로 데려가 덤덤히 건네주던 선배의 소주잔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혼자 있을 때 존재감 더 충만”
지금 김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글처럼 단순하고 간결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경기도 안산 경기창작센터에서 혼자 글을 쓰고 지내며 주말에는 일산 집에 머무른다.

지난 10월 화창한 어느 날 안산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거기에는 일체의 장식이나 번잡함, 군더더기가 없었다. 책상, 의자, 소형 라디오와 오디오, 전기 스탠드 2개, 그리고 서류함으로 쓰이는 중국집 철가방이 전부다. 책은 새우리말큰사전(상·하), 옥편, 이순신의 『난중일기』.

흔한 노트북 컴퓨터도 없고 연필깎이·필통·지우개·원고지가 작업 도구의 전부다.

그는 하루 세 시간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홀로 새·노을·바다·산야를 구경하며 돌아다닌다고 한다.

“난 어려서부터 혼자 노는 걸 좋아했어. 커서도 번잡함이 싫어 평생 가 본 영화관이 다섯 군데도 안 돼. …나이 오십 넘어 자전거를 배워 혼자 놀러 다녔지.”

그는 지금도 사람 소리,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싫어 집을 떠나 이곳에 머문다고 했다.

“혼자 있으면 더 존재감이 충만해지는데 왜 사람들은 외롭다고 하지?”

작업실 벽에는 하루에 원고지 다섯 장은 꼭 쓰자는 의미에서 ‘필일오(必日五)’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다.

김훈의 글이 서늘하듯이 그를 만나면 서늘하게 느껴진다. 친근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으며 간혹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글쟁이’ 김훈이 방송인 손석희처럼 말을 잘하거나 세련될 필요는 없다.

이제 김훈 글에서 그의 목소리를 찾기 어렵다. 그는 다만 보여 줄 뿐이다. 그러나 독자는 무언(無言)의 울림을 안다.

어쩌면 ‘Show, Don’t tell’이야말로 온갖 주장과 위선(僞善)이 난무하는 지금 이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인생의 경구(警句)가 아닐까.

나도 일상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나 쉽지 않다. 어느새 비판하고 주장하고 가르치고 자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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