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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음악 읽기] 외모는 ‘인상파’ … 연주는 가을하늘 복사판

중앙선데이 2014.11.02 02:14 399호 27면 지면보기
1819년 요제프 스틸러가 그린 베토벤의 초상. 악보에는 당시 베토벤이 작곡에 몰두했던 ‘미사 솔렘니스 D장조’의 제목이 적혀 있다.
“문화평론가라는, 저 꽁지머리 묶은 양반이 원래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

“아, 네, 저, 그러니까 (레코드) 판 모으는 사람이죠.”

“아, 그렇군요.”

회현동 판가게에서 벌어진 문답이란다. 요즘 또 필사적으로 판을 사러 다니고 있는데 잦은 종편 출연으로 얼굴이 팔린 터라 판가게 주인들이 종종 질문을 받는단다. 저 사람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고.

판을 사면 샀지 ‘필사적’이라고 과장스러운 수식을 붙이는 까닭은 뭘까. 그건 그러니까 정말로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오전 11시에 여는 가게에 미리 당도해서 문 닫는 저녁 8시까지 LP박스에 코를 박고 꿈적도 않는다. 한 장 한 장 내용물 상태를 확인하고 재킷의 글을 읽고 틈틈이 모니터링도 하다 보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다. 하도 오래 해왔던 일이라 돋보기를 끼고 비스듬히 LP의 그루브를 들여다보면 소리가 들린다. 공연장이나 레코딩 스튜디오 또는 야외 음악당의 상황도 마치 현장에 있는 듯이 그려진다. 환각이고 몽환이다. 나는 직업이 ‘판 모으는 사람’이라는 가게 주인의 규정에 별 불만이 없다.

문제는 사람에게 생각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판더미에 둘러싸인 환각적 상태에서 마냥 꿈나라를 헤엄치면 좋겠는데 그놈의 ‘가책’이라는 흉기가 옆구리를 찌르곤 한다. 양심의 가책 말이다. 얘기를 또 종편으로 돌리자면 ‘황금알’ ‘강적들’ 등등의 프로그램에서 꼭 하고 싶은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하는 발언도 많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명확하다. 회현동에 가거나 이베이 경매에 참여하기 위한 자금 마련책이다. 방송에서 내가 하는 말들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판 값이라고 해도 좋다.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와 피셔가 1950년대 녹음한 슈베르트 가곡 실황 앨범 표지.
판 값은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킨다. 한 백여 장 염가반을 사서 지고 올 때는 그리 가책이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른바 고가반, ‘초반(初盤)’에 탐욕을 부리는 상황이다. 당연히 음질의 우월성 때문에 고가반을 찾는 거지만 다른 심리적 요인도 작용한다. LP컬렉터로서 그루미오나 클라라 하스킬의 연주들은 왠지 초반으로 갖춰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거의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글렌 굴드의 앨범들도 초반이 보였다 하면 참지 못하고 또 산다. 그런데 그 가격이라는 것이… 택시기사나 마켓 점원의 하루 일당이 얼마인지 잘 아는 나로서는 초반이 담긴 음반 한 봉지에 한 달 출연료 이상을 지불하고 돌아설 때의 허무한 심정을 수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허무가 요즘은 매일같이 벌어진다. 밥이라도 굶어야 한다. 몸이라도 학대하는 것이 위로가 되니까.

오래전 보증금 400만원짜리 반지하 월세방에 살 때 오디오 가격만 3000만원을 넘었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 10시간씩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번 돈 이상을 판 값으로 지불한다. 그리고 밤에 확인한다. 벨 앤드 세바스천의 모든 음반을 구입해 발매 연도대로 추적해 들으면서 참 잘했어, 바로 이 음악적 변천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 은행 잔고가 쌓이는 것보다 훨씬 나은 길이지라고. 밥 대신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이게 분수에 맞는 일이지라고. 모든 저녁 모임을 사양하면서 작업실에 처박혀 몸부림치는 참맛을 당신들은 모르지라고.

에드윈 피셔의 1950년대 음반들을 찾고 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과 푸르트벵글러와 함께한 협주곡 몇 장을 듣는데 이 할아버지 신비롭다. 그동안 빌헬름 박하우스라는 활화산에 눌려 내게는 빛을 못 보았던 것 같다. 조콘다 데 비토의 바이올린 반주자로서도 뛰어나다. 일렉트롤라의 ‘다카포’ 시리즈로 여러 장을 갖고 있는데 분명 상태 좋은 초반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원 포인트 녹음이었을 50년대 레코딩들은 텅 빈 공간감이 오히려 충만함을 배가시키는데 피셔의 피아노는 대단히 간결하면서 집중도가 높다. 아름다운 쇼팽보다 공격적인 쇼팽 연주를 좋아하는 대신 베토벤 피아노곡에 대한 기대는 정반대다. 베토벤의 ‘나쁜 성격’은 잘 알려져 있다. 나쁜 성격은 때로 좋은 성정의 반영이다. 세상에는 못 참을 일들이 많으니까. 베토벤 피아노곡의 격정을 그렇게 이해하는데 에드윈 피셔는 그걸 터뜨리기보다 다스린다. 내가 본 모든 음반 사진에서 피셔는 더럽게 인상을 쓰고 있는데 연주는 뜻밖에도 가을 하늘의 청명이다. 그러니까 베토벤에서 피셔까지 성격파들의 심리적 굴절이 죽 관통한다. 명창 박동진옹의 목청으로 에드윈 피셔는 이렇게 일갈한다. ‘나쁜 것은 조오흔 것이여!’

오늘 또 일정이 비는데 회현동을 찾을까나 이베이 서핑으로 날궂이를 할까나.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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