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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계룡산 남매탑 앞에서

중앙선데이 2014.11.02 02:17 399호 27면 지면보기
학창 시절 이런 노래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요즘 이 노래는 전설이나 세월을 이야기하는 한 편의 수채화일 뿐이다.

그만큼 내 영혼의 수채화는 메말라 버린 것일까. 어젯밤에는 문득 ‘이 가을에 나는 마땅히 편지 쓸 곳이 없구나, 아니 우표 한 장 정답게 부칠 곳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수행자는 생각이 화두이며 ‘바라봄’인데 가을 편지가 나에게는 어쩌면 작은 화두였다. 언제부턴가 ‘내 삶도 남과 다르지 않구나’ 하는 마음이 머물렀고, 그것은 삶에 대한 작은 침묵이었다.

봄꽃이 피면 피는가 보다, 튼실한 여름의 햇볕 아래 열매가 맺으면 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다 찬바람 불고 길가에 나뭇잎이 떨어지면, 그때서야 하늘을 쳐다보는 일상이 나에게는 1년의 시간을 되짚어보는 ‘화두 농사’였곤 했다. 깨달음 또한 거창한 것이 아니며, 삶에서 밥 먹고 잠자는 것이 오롯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수행자의 생활이냐고 예전 선배들은 말해 왔다. ‘특별한 것을 찾지 마라, 그것이 도(道)를 방해한다’고 말해줬던 금쪽같은 말들은, 지금도 나를 겸허하게 만들곤 한다.

엊그제 지인과 함께 가까운 계룡산 남매탑에 올랐다. 가을을 만끽하기 위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올랐는데, 사흘 전에 비가 온 탓인지 계곡 물결 소리가 맑고 물그림자도 낙엽을 흩트리기에 딱 좋았다. 사람들은 곁에 떨어지는 홍엽을 보며 “역시 나무의 아름다운 결정은 가진 것을 내려놓는, 낙엽 지는 퍼포먼스가 일품이지”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남매탑 언덕의 정상에 올라 김밥을 먹는 와중에, 어디서 몰려왔는지 산 넘어 바람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그때 겨울눈처럼 낙엽이 김밥에, 모자에, 얼굴에 스치며 황홀하게 떨어져 내렸다. 3년 전에도 올라왔지만, 이런 낙엽 폭풍 현상은 연출되지 않았었기에 더욱 진기했다.

세상의 일들은 있어지고 없어진다. 어쩌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인간의 기억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삶의 자취라고 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공수래 공수거’일 뿐인데…. 가진 것 없이 왔다 옷 한 벌 얻어 입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횡재냐 하는 노래도 있지 않던가.

어느 선각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해외 유명한 이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에게 의탁하여 1년이 지났을 지음, 스승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자네는 세상으로 다시 내려가게. 더 이상 여기에 머물 필요가 없네.” 제자는 의문을 제기했다. “깨달음을 더 갈구해야 저는 내려갈 수 있습니다.” 스승의 답변은 이랬다. “너는 세상이 꿈이라는 환상을 보지 않았는가.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을 깨달으리오. 이제 하산하라.” 제자는 두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세상이 환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란 뜻이었다.

가을 단풍이 대추알처럼 빨갛게 익은 곳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 사진 찍자, 유리처럼 맑은 단풍이다”며 말이다. 사람들이 향하는 마음은 항상 두 가지다. 맑은 것, 그리고 가벼운 것. 그리고 하나 덧붙인다면 되돌아 정리된 자신의 삶이다.

산 중턱 남매탑의 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그 자리였다. 초심처럼 서 있는 돌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느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변화무쌍한 것이 아니고, 조용히 그리고 무심하게 그 자리에 있는 것임을. 그런 은은함을 스쳐 지나감이 또한 가을의 멋이라고 생각했다.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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