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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체제의 큰 문제 푸는 건 작은 결정과 실천의 ‘부분 공학’

중앙선데이 2014.11.02 02:23 399호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얼마 전 새누리당의 김태호 최고위원이 “국회가 밥만 축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고 뉘우치는 차원에서” 최고위원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면서 당과 국회가 경제활성화를 위한 법안들을 심의하지 않고 개헌론과 같은 정치 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비판했다.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있지만, 발언 내용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정체된 정치 상황을 바라보며

정치인들이 “밥만 축내고 있다”는 것은 요즘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일 것이다. 전에 쓴 한 칼럼에서 정치가의 대부분을 종신형에 처한다면 환영할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미국의 풍자가 앤디 보로위츠의 말을 언급한 일이 있지만, 정치에 대한 혐오감 또는 적어도 권태감은 세계적인 것으로 보인다(근본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미래 전망이 대안 없는 하나의 이념으로 수축된 데에 관계된다). 이러한 느낌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특히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개헌 논의도 그러한 상황을 시정해 보자는 시도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를 활성화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사회가 전기 맞으면 큰 지도자 출현
많은 경우 정치가 중심에 놓이게 되는 것은 그럴 만한 상황으로 인한 것이다. 위대한 정치지도자가 나타나는 것도 반드시 그의 개인적인 능력으로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어떤 전기(轉機)에 이를 때 큰 차원에서의 정치 행동이 필요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큰 정치 지도자가 출현한다. 그것도 갑자기 지도적 인물이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 상황에 대한 대응 과정이 그러한 지도자를 단련하여 출현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침체된 정치는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상황 자체가 정태 또는 안정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정치가 굼뜨게 되는 데에는 다른 원인들이 있을 수 있다. 강력한 정치 행동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대응할 수 있는 정치력을 조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가 정체에 빠질 수 있다. 분명하게 정치를 자극하는 상황은 외침의 위협이다. 그리하여 정치 이론가들은 국가 또는 다른 정치 집단의 결속과 단합을 강화하고 그 존재를 활성화하는 것은 적(敵)의 존재 그리고 전쟁이라고 한다. 적은 현실로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상상되고 조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근대적 경제 발전 또는 체제 변혁의 필요도 정치력의 동원을 추구한다.

요즘 정치의 무기력은 어떻게 설명되는 것일까. 사태의 큰 테두리-가령 지구환경의 문제 또는 통일이나 동아시아의 평화 문제에 잠재적 위기의 요인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테두리를 너무 크게 잡지 않는다면 나라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태평성대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더러 주장되는 바와 같이, 민주제도의 내실화와 공고화가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의 중요한 역사적 과제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경제의 활성화가 절실하다는 것도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명제일 것이다.

경제는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된다. 한 관점은 경제 전체가 장기적인 침체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걱정하는 시각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경제 상황은 큰 조건들-경제발전의 단계, 그것과 다른 여러 나라 경제와의 다면적인 관계, 또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되풀이해 이야기되고 있는 구미와 일본의 선진경제에 대한 비관적 전망 등이 얽혀 있다. 이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경제를 보는 다른 하나의 관점은 재화와 소득의 분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 오늘날까지 스스로를 중산 계급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인구가 75%에서 20% 정도로 줄었다는 보고가 있다. 분배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 말한 두 가지의 관점에서 나오는 문제의식이 완전히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 활성화는 어느 쪽에서 접근하든 문제의 해결에 다 같이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다만 환경론자의 입장에선 경제의 활성화는 해답이 아닐 수 있다).

경제정책은 전문적 지식 아니면 적어도 심도 있는 연구와 고려, 그리고 선택을 요구한다. 최종의 정책 결단은 다수 국민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그 정책의 세부 사항은 쉽게 정치적 정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분배의 문제는 조금 더 정치적 정열에 직결된다. 그러나 그것도 그 구체적인 방안에 있어선 감정을 넘어 심도 있는 경제학적 또는 정치경제학적 고려를 필요로 한다.

개혁 대상에 문제 있을 땐 해결 더 어려워
체제 전체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문제는 사실적 고려에 입각한 작은 결정과 실천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정치 상황의 어려움은 작은 일들로서 큰일을 해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작은 일로 큰일을 해내는 것은, 큰일을 하는 것 또는 저지르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정치의 변화를 생각할 때, 개혁보다는 혁명이 보다 쉽게 의제가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개혁의 경우, 그 대상이 모순을 가지고 있을 때 문제의 해결은 더욱 어려운 것이 된다. 지난달의 칼럼에서 장하성 교수의 저서 『한국 자본주의』를 언급하면서 나는 장 교수가 제시하는 과제를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지향하되,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세밀한 수단과 방법”으로써 이뤄내야 한다고 요약한 바 있다. 그것은 작은 일들로써 큰일을 이뤄 내야 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이 크고 작은 것의 불균형에 더하여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라는 목표는 그 자체로 모순과 긴장을 내장한 목표다. 그리하여 문제의 해결은 극히 조심스러운 균형 속에서만 근접될 수 있다. 많은 이론가가 자본주의와 정의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섬세한 ‘부분 공학’이 필요한 것이다. 이 공학은 물론 사회공학이고 정치공학이다.

이 공학이 요구하는 정치 개입은 시장의 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어기는 일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려 하지 않는 문제로서-정치적 개입은, 그것이 강압적인 것이 되는 경우, 시장경제가 내포하고 있던 정치 이상 하나를 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그 이상은 인간의 권리로서의 자유의 실천이다. 시장의 자유도 이념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이 자유의 일부다.

그런데 자유의 이상은 이미 모순의 조화를 가설로서 전제한다. 전제란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적 질서에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의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의 자유 속에 작용하는 질서 창출의 매개자를 지칭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이 매개자는 시장에 있어서나, 다른 사회 제도에 있어서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보이는 정치적 개입이어야 한다. 분명하게 보인다고 하는 것은 개입이 정치권력의 자의적인 결정이 아니라 납득할 만한, 그리고 법과 제도로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납득한다는 것은 이성의 관점에서 그 필요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성적 또는 합리적 손익 계산은 공유하는 사회질서를 위하여 내 자유의 축소를 받아들이게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이성적 고려는 손익 계산에 입각한 타협이 아니라, 공정성의 원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일 수 있다. 지난달 칼럼에서 이름을 비추었던 존 롤스가 『정의의 원리』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이성적 반성에서 나오는 공정성의 원리다. 이 원리는 나를 넘어가는 사회 세계의 객관적 원리이지만, 동시에 높은 차원으로 지양된 자아의 중심이다.

큰 것도 보이지 않으면 마음 벗어나
공정성의 원리는, 다시 말하면 이성의 원리다.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세밀한 수단과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기능이다. 그리고 이때 세밀한 것들에 대한 고려는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진다. 여러 작은 고려 속에서 큰 이성은 뒷전에 유보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뒤에 유보되어 보이지 않는 큰 것은 사람의 눈 그리고 마음을 벗어나기 쉽다.

전체성은 사람의 열정을 유발한다. 이성도 전체를 거머쥐는 것으로 느껴지는 까닭에 정열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의 원리가 되려면 구체적 현실 속에서 변주될 수 있어야 한다. 고야의 그림 중에 ‘이성의 잠은 괴물들을 태어나게 한다’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그림에는 잠자는 사람이 있고 그 머리 위로 괴물들이 날고 있다. 제목으로 보아 그림에 대한 제일 간단한 해석은 이성이 잠들면 괴물들이 풀려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이 꾸는 꿈이 괴물들을 만들어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성의 정열은 혁명을 낳을 수 있다. 그러면서 이성의 혁명적 정열이 어떻게 구체적 현실의 이성이 되는가 하는 것은 숙제로 남는다. 그렇게 변주되는 경우, 그것은 이성의 정열을 식게 한다.

전체성은 정열을 촉발한다. 이성은 그 전체성의 주장으로 하여 정열에 이어진다. 그러면서 전체성은 이성을 넘어간다. 전체라는 것이 참으로 삶과 세계의 모든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현실 이성의 한 영역에 한정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초월적인 세계를 암시한다. 그러면서 또한 전체란 우리가 직접적으로 느끼는 어떤 것이다. 촛불집회와 같은 대중 집회는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로 환원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집단 현장(現場)은 집단 전체와의 일체감을 현실화한다. 그것은 정열의 폭발이 될 수도 있고, 심미적으로 승화된 것일 수도 있다. 집단 행위에 추구되는 일체성의 체험을 심미적 형식으로 승화한 것이 의례나 축제다. 무리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전체성을 향한 근원적인 일체감의 요구에 이어진다. 이러한 요구는 이해의 합리적 계산이나 공정성-결국은 개체들 간의 물질적·정신적 재화의 균등 분배를 말하는 공정성을 넘어 개체를 전체성에 열어 놓는다. 그것은 정신세계로 열리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와의 일체감이 세속 세계에서 심미적으로 승화되었을 때 우리는 문화의 개화(開花)를 본다. 이성은 이러한, 보다 넓은 문화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정신과 감각적 아름다움을 정제(整齊)된 문화로 통합하는 중재자이고 그 중심이다. 이때 이성은 차가운 손익 계산의 수단이면서 그것을 넘어가는 정신적 영감, 그리고 부드러운 삶의 원리다. 그리고 현실 문제 해결의 세밀하고 섬세한 수단이 된다. 우리는 정열, 이성의 정열, 그것이 굳어진 이데올로기를 안다. 그러나 세밀하고 섬세한 삶의 원리로서의 이성에 익숙하지 않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정체감(停滯感), 그러면서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사회의 어지러운 움직임은 이러한 총체적인 문화 진화의 과정을 생각하게 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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