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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 1100만원 강남 주택 빌려 … 영화 '타짜'처럼 도박

중앙일보 2014.10.30 00:51 종합 8면 지면보기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2층짜리 고급 주택에서 바카라 도박을 벌인 일당 37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월세 1100만원을 주고 집을 계약해 도박장을 열었다. 집 입구에는 CCTV(원 안)가 있어 외부인 감시가 가능하고 뒤편은 야산과 연결돼 도주가 쉽다. [김상선 기자]


지난 21일 밤 서울 서초구 양재역을 빠져나온 원모(44)씨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원씨는 전철역 근처에서 비상등을 켜고 있는 검은 승용차를 발견하고 곧장 차에 탔다. 10여 분을 달려 서초구 내곡동의 주택가로 들어선 차량은 오르막길에 있는 한 고급 주택 앞에 멈춰 섰다. 1·2층을 합쳐 건물 넓이가 311㎡(약 94평)인 번듯한 2층 집이었지만 사실은 월세 1100만원에 김모(45)씨가 계약한 도박하우스였다.

전문 도박판·칩 갖추고 숙식 제공
딜러까지 고용 실제 카지노 방불
뒤뜰엔 야산으로 연결된 도주로
지난해 서울 도심서만 113건 적발



 원씨가 현관문을 열자 넓은 거실과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주방의 대형 솥에는 밥이 가득했고 라면과 샌드위치, 반찬 등 갖가지 음식이 마련돼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커피와 자양강장제, 1회용 칫솔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현관문 맞은편의 두꺼운 커튼 너머에 테라스가 있었고 바비큐 그릴과 의자도 보였다. 테라스 뒤쪽의 정원은 곧장 야산으로 연결됐다. 2층 오른쪽 방에선 ‘카지노 게임의 왕’으로 불리는 바카라 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실제 카지노에서 쓸 법한 금액별 칩, 카드를 섞어 2장씩 나눠주는 도구, 그리고 여성 딜러 3명까지 있는 ‘진짜 도박판’이었다. 원씨는 오후 11시부터 바카라 게임에 끼었다고 한다.



 그러나 ‘판’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전 1시40분쯤 “지인이 도박을 하러 갔다”는 신고를 받은 서울 서초경찰서 경찰들이 현장을 급습했다. 경찰은 굳게 잠긴 현관문 대신 옆문으로 진입했다. ‘문방’(차량으로 도박 참가자들을 실어 나르고 도박장 주변에서 망을 보는 인원)까지 배치하고 단속에 대비했던 도박꾼들은 현금 등을 재빨리 주머니에 숨겼다. 몇몇은 테라스를 통해 뒤쪽 야산으로 달아나려 했다. 경찰은 도박장을 개설한 김씨와 딜러 3명, 참가자 33명 등 37명을 전원 체포해 22일 불구속 입건했다.





 영화 ‘타짜’에나 등장할 법한 ‘도심 속 불법 도박하우스’가 성행하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에 따르면 2012년 162건, 지난해 113건 등 서울에서만 매년 100건 이상의 ‘도심 속 도박장’이 적발됐다. 올해도 9월 말까지 71건이 단속됐다.



 규모와 수법도 진화하고 있다. 과거 오피스텔이나 당구장 등에서 소규모로 도박을 하거나 도심 외곽의 창고·비닐하우스 등에 도박장을 열었던 것과 달리 서울 고급 주택이나 호화 오피스텔에서 불법 도박판을 벌이는 경우가 흔해졌다.



 도박장 개장자와 참가자는 주로 정선 강원랜드 등에서 도박을 하다가 만난 이들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번에 단속된 일당도 강원랜드에서 인연을 맺었다. 이들은 서로의 연락처를 ‘양평 엄마’ ‘신사동 이모’ 등의 별명으로 저장해 놓고 몰래 연락을 주고받으며 도박장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도박장 건물 계약자는 보통 도박 전과가 없는 경우가 많다. 검거될 때를 대비해 대부분 ‘바지사장’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번에 검거된 김씨도 도박 전과가 없다. 김씨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숙소로 사용하겠다”며 월세 1100만원에 고급 주택을 빌린 사람이다. 하지만 경찰은 김씨가 월급을 받고 고용된 바지사장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바지사장은 구속되면 추가 수당과 변호사비까지 받기로 약속을 하기 때문에 주범을 말하지 않고 자신이 대신 구속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바지사장 내세워 주범 안 잡혀=바지사장을 내세운 주범, 즉 개장자가 구속을 피한 뒤 다른 곳에서 도박장을 차리는 일도 흔하다. 마치 ‘떴다방’ 같은 방식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도박장을 열고 판을 벌이는 것이다. 실제 이번 도박장에 참가자를 실어 나른 차량은 지난 9월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검거된 도박단 일행이 사용했던 차량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참가자도 4명이 겹친다. 당시 경찰은 도심 한복판 빌딩에 카지노를 차리고 도박을 벌인 피의자 15명을 검거했다. 이번 사건을 맡은 서초경찰서는 현재 판돈 규모와 도박 시기를 특정하고 주범을 찾기 위해 추가 조사를 진행 중이다. 경찰은 “바지사장을 고용한 진짜 도박장 개장자를 찾아야만 도박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다”며 “이 부분에 수사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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