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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 협박에도 '조선인 징용 추모비' 만드는 일본 마을

중앙일보 2014.10.30 00:44 종합 12면 지면보기
일본 홋카이도 사루후쓰 지역 조선인 징용자들의 유해 발굴 지역을 돌아보는 미즈구치 고이치. 오른쪽은 그의 주도로 건립이 추진되던 중 일본 극우 세력의 협박으로 완공되지 못한 추모비다. “일본 육군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 공사의 조선인 희생자를 애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사진 뉴욕타임스]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의 작은 마을 사루후쓰(猿拂). 인구 2400명 규모의 ‘무라(村)’인 이 곳의 토박이 미즈구치 고이치(水口孝一·79)는 “마을 어딘가에 조선인 유골이 숨겨져 있다”는 50년 전 동네 우체국장의 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주민들 "어두운 역사 잊으면 안 돼"
잇단 '배신자' 위협 … 건립 중단 위기
NYT서 조명 … 일본 우경화 꼬집어



 젊은 시절 흘려 들었던 그 말이 신경 쓰인 건 2000년대 들어서다. 그는 조사 끝에 인근 아사지노(淺茅野) 비행장 건설을 위해 조선인 징용자들이 끌려왔으며 이들 중 최소 80명이 영양 실조와 티푸스 등으로 사망했다는 문서를 입수했다. 수수께끼는 유해가 묻힌 곳이었다. 묘지로 추정되는 곳은 일본 제지회사가 조림한 소나무·자작나무 숲으로 변한 상태. 그는 촌사무소 및 한국측 단체들과 손잡고 발굴에 나섰고 2006~2009년까지 세 번의 작업 끝에 38구의 유해를 수습해 인근 사찰에 모셨다.



 그러나 그와 마을 동료들에게 돌아온 건 ‘배신자’라는 낙인이다. 인터넷을 통해 결집한 일본 우익 단체들의 협박 전화가 빗발치는 통에 사루후쓰 촌사무소는 지난해 11월 추진했던 추모비 건립 완공도 중단했다. 이들은 건립 비용 일부를 한국 정부가 지원했다는 점도 문제 삼았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사연을 28일 조명하면서 사루후쓰를 ‘배신자 마을’로 낙인 찍고 협박한 주요 세력이 ‘넷 라이트(Net Right)’라는 점에 주목했다. “규모는 작지만 인터넷 공간을 통해 똘똘 뭉치며 공격적 성향을 보인다”며 “미즈구치처럼 자국의 어두운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는 이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NYT는 넷 라이트의 구성원이 주로 안정된 직장을 못 구한 젊은층이며, 이들은 극우 성향을 통해 사회 불만을 표출해왔다고 분석했다. 사카구치 쇼지로(阪口正二郞) 히토쓰바시(一橋)대 교수가 “넷 라이트의 득세는 (일본인들이) 자국의 쇠락을 걱정하는 상황을 반증한다”고 풀이하는 배경이다.



 NYT는 “넷 라이트가 일본이 지난 70년간 나가사키(長崎) 원폭을 주도한 미국은 물론 이웃국가인 한국·중국에 의해 ‘악당’으로 표현됐다는 점에 분개한다”고 진단했다. 교모토 가즈야(京本和也·26)라는 유명 우익 블로거가 대표적 넷 라이트다. 사루후쓰 추모비 건립을 “자기학대적 발상”이라며 강력 반대한 교모토는 NYT에 “일본더러 계속 사과하라는 목소리가 진저리 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강제 징용’이라는 표현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NYT의 취재에 응한 넷 라이트 일원 마토바 미쓰아키(的場光昭)는 “강제 징용이란 날조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NYT지적처럼 “일제 시대 조선인 약 70만명이 강제 징용됐다는 게 주류 역사학자들의 견해”며 “사루후쓰의 조선인 징용자들은 감옥과 같은 비위생적 시설에서 노역해야 했다”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넷 라이트 자체는 수천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최근 일본의 오랜 경기 침체에 지친 젊은 세대가 이들에게 동조하며 세력화하고 있다. NYT는 넷 라이트 세력 견제에 소극적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아베 정권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몰락한 야당이 문제를 키우고 있다고 봤다. 사루후쓰뿐 아니라 올해 ▶군마(群馬)현의 조선인 추모비 철거 결정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건립 좌절 ▶극우 인종차별단체인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득세 등을 들어 “일본에겐 군국주의 과거를 직시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면서도 “최근엔 넷 라이트의 득세 등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일로”라고 우려했다. 아베 내각의 야마타니 에리코(山谷えりこ) 납치문제 담당상 등은 재특회 간부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기사를 쓴 마틴 팩클러 NYT 기자는 본지와의 e메일에서 “극우주의자들이 의견이 다른 이들을 위협하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데다 이에 제동을 걸 일본 정치·사회 지도자들이 없다는 점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며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건강한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즈구치와 같은 이들의 분투는 희망을 보여준다. 미즈구치는 “(넷 라이트에 반대하는) 다른 일본인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야속하다”면서도 “역사를 직시하려는 우리의 눈을 감기려는 일부 외부 세력에게 굴하지 않을 테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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