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꿈꾸는 목요일] 인문계 취업난 해법 없나

중앙일보 2014.10.30 00:37 종합 16면 지면보기
이예지(28)씨는 건국대 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이 대학 동물생명과학부에서 축산경영·유통경제학을 복수 전공했다. 인문계 전공만으론 취업이 쉽지 않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학과 동기들은 대부분 경영학을 복수 전공하거나 교직 과목을 이수했지만 이씨는 이공계 전공이라는 생소한 길을 택했다. 축산 분야 전공 학생들은 대부분 이과 출신이었다. 문과였던 그는 “화학·생물·식품영양학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2012년 글로벌 곡물기업인 카길 한국지사에 취업했다. 졸업 무렵 그가 원서를 냈던 기업들은 영어 실력과 이공계 전공을 겸비한 대목에 관심을 보였다. 이씨는 “전혀 다른 분야를 선택할 만큼 축산업에 열정이 있다는 평이 많았는데 취업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카길' 입사한 영문과 학생, 비결은 축산학 복수전공
인문계 전공만으론 취업문 못 뚫어 대학들 다양한 복수전공 트랙 마련
1학기 문학·연극, 2학기 예술·IT수업 문과·이과·예술 융합한 전공도 늘어
문과 성향인데 취업이 걱정된다면 “이과 가라” 강요 말고 다양한 경험을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학 인문계 졸업자의 취업난이 극심해지면서 진로 선택을 놓고 고심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늘고 있다. 당장 고1이 끝날 무렵 정하는 문과·이과 선택을 놓고 갈등하는 이들이 많다. 고1 자녀를 둔 이모(48·여)씨는 “아이는 문과 성향이 강한 것 같은데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어렵다고 해 이과로 가라고 설득 중”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단계별로 진로 탐색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주문한다.



 서울시교육청 진로적성교육과 김남희 장학사는 “초등학교 때는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다양한지 아는 게 중요하고 중학교 때도 한두 가지 직업을 정하지 말고 직장이나 대학 학과를 두루 체험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 때는 본인이 하고 싶은 분야의 직업을 체험해 봐야 한다”며 “요즘은 기업도 융합형 인재를 원하므로 구체적인 대학 학과를 염두에 두고 시야를 넓혀 보라”고 조언했다. 진학사 청소년교육연구소 강원구 연구원은 “아이의 성향을 무시한 채 대학에 잘 가기 위해 학과도 보지 않고 부모가 문·이과를 결정하게 해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수능체계 때문에 고교에서 문·이과 구분을 해 수업을 듣는 게 일반적이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문·이과 성향을 두루 갖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최근엔 대학에도 문과생이 갈 수 있는 융·복합 전공이 늘고 있다.



 융·복합 교육의 메카는 미국 카네기멜런대 ‘엔터테인먼트테크놀로지센터(ETC)’다. 이 대학 예술대학과 컴퓨터공대는 ‘좌뇌와 우뇌 모두를 위한 교육 과정’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998년 센터를 설립했다. 공학과 예술, 인문학을 접목한 실무 중심의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데 첫 학기 외엔 모든 수업이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가상공간 시뮬레이션·게임 개발 등의 프로젝트를 마이크로소프트·인텔·픽사·록히드마틴·미국 항공우주국(NASA) 등과 진행한다. 졸업자 대부분은 월트디즈니 같은 엔터테인먼트기업이나 실리콘밸리 정보기술(IT) 회사에 취업한다.



건양대 창의융합대 학생들이 생물 실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문·이과 구분 없이 기초과학을 이수한다.
 국내에서도 이 센터를 모델로 한 학과가 등장했다. 2012년 첫 신입생을 뽑은 서강대 아트&테크놀로지 전공이다. 문과 출신이 70%를 차지하는 이 학과에선 인문학·예술·테크놀로지를 함께 가르친다. 재학생 김준하(20)씨는 “1학년 1학기엔 소설을 읽고 선택한 철학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뒤 이를 연극을 공연했고, 2학기엔 ‘수학과 시각예술’ ‘창의적 프로그래밍’을 배웠다”고 소개했다. 올해 첫 신입생을 선발하는 중앙대 산업보안학과는 경영경제대학 소속이지만 교육 과정은 법학·심리학·통계학·프로그래밍·디지털포렌식(감식) 등을 아우른다. 건양대 창의융합대학은 입학 후 문과생에겐 화학·물리·생물 중 두 과목을, 이과생에겐 독서토론 등 인문·사회과학 과목을 의무적으로 수강하게 한다. 유웨이중앙교육 이만기 평가이사는 “취업난 속에 대학들이 융·복합 학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는데 문과 수험생들의 선호도가 높아 합격선도 높게 형성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이미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라면 복수 전공을 활용하거나 이공계 지식·기술을 익힐 수 있는 수업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아주대 사학과 4학년 이진우(22)씨는 지난해부터 공대에서 프로그래밍을 복수 전공하고 있다. 그는 “역사를 좋아해 사학과에 진학했지만 스마트시대에 인문학만 배워선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다”며 “졸업 후 역사 콘텐트나 게임 개발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톨릭대 재학 중 ‘미디어콘텐트 캡스톤디자인’ 수업에서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조진영(25·일어일본문화)씨는 애니메이션 제작회사에 취업했다. 조씨는 “전공을 바꾸지 않았지만 영화 제작에 참여한 경험과 제작진에게 얻은 조언만으로도 관련 분야 취업에 도움이 됐다”고 귀띔했다.



 진로 탐색은 초·중학교 단계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진학사 강원구 연구원은 “학생들이 공부만 하다가 고교에 입학해 문·이과 선택이라는 벽에 부닥쳐 당황하곤 한다”며 “일찍부터 적성과 진로를 고민한 학생들이 시행착오가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찬 서울대 산업인력개발학과 교수는 “어린 학생들이 사회에 나갈 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직업이 생길 것”이라며 “초·중학교 때는 특정 직업을 목표로 세우는 대신 적성과 흥미, 진로의 다양성을 깨치는 과정에 의미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인성·신진 기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