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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국 정치가 역사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

중앙일보 2014.10.30 00:10 종합 33면 지면보기
유준호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산학협
력단 단장·전 청와대 행정관
한국 정치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됐다. 국민의 눈에는 벌거벗은 흉한 모습인데, 정작 정치인들만 자기들이 옷을 잘 입고 있는 듯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가 신뢰받지 못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한국 정치는 ‘전신 마비’ 수준에 이르렀다. 여야는 반년 넘게 세월호 참사를 놓고 편싸움만 벌였으며, 청년 백수가 넘쳐나는 심각한 현실에 아랑곳없이 정파적 다툼에만 골몰하고 있다.



 정치의 중심인 국회를 언제까지 기능 부전 상태에 빠져 있도록 방치할 수 없다. 권력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개헌까지는 힘들다 해도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제도와 정치자금법의 손질이라도 서둘러야 한다. 한국 정치가 1987년 민주화와 2004년의 이표병립제(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의 분리)에 힘입어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 왔지만 여전히 우리 국민은 정치 개혁에 목말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고질병은 지역할거주의가 여전히 판친다는 점이다. 영호남에는 양대 정당의 후보가 공천만 받으면 사실상 당선이 보장된다. 이 지역의 국회의원 숫자가 압도적 다수는 아닐지라도 이들이 여야의 주요 당직을 점하고, 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의사 결정을 좌우하는 게 현실이다. 그 결과 정치인들은 국민 지지보다 공천권에 목을 매고, 양대 정당이 모두 지역할거주의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현 선거제도에선 양대 정당이 늘 국민의 지지율보다 훨씬 많은 의석수를 차지한다. 소수 정당은 의회정치에 발을 못 붙이고 있다. 문국현·정의당·민노당 등이 한때 반짝하고 스러졌거나 미미한 존재로 내려앉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다원화·다양화 추세와 어긋난다.



 셋째, 선거 때마다 절반 가까운 국회의원이 물갈이되는데도 우리 국회에는 늘 거수기만 꽉 차 있는 분위기다. 오히려 초선일수록 더 극성맞게 행동대원으로 나서 정치판을 어지럽히고 있다. 공천권이 중앙당 지도부에 의해 장악돼 있으니 새로 수혈된 ‘새 피’들이 순식간에 어혈(瘀血:피가 제대로 돌지 못해 한곳에 맺혀 있는 증세)로 변질돼 버리는 게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이런 폐해들을 고치려면 우선 중대선거구제의 도입부터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소선거구에 익숙해져 있는 정치권은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도 별 변화가 없을 것”이라며 외면해 왔다. 새누리당이 호남에서 거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새정치민주연합 역시 영남에서 단 몇 명이 당선되는 데 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변하고 있다. 대구에서 야당의 김부겸 후보가 40%를 넘나드는 득표를 했고, 전남에선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큰 표 차로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제 중대선거구제가 해묵은 지역주의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미 영호남 유권자들의 의식이 깨어 변화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시작한 만큼 정치권이 선거제도 개혁으로 호응한다면 예상 밖의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지역구 의원 비율을 줄이고 비례대표를 늘리면 소선구제로 인한 사표 왜곡현상을 완화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정치권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게 된다. 소수 그룹의 의견을 국회에 반영하려면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우선 원내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현행 의원 20명에서 대폭 낮출 필요가 있다. 최근 양대 정당이 국정을 표류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제3의 교섭단체가 있었다면 여야가 옹고집을 피우지 못할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의 선택지는 선거비용 보전 득표율을 현행 10%에서 서구 수준인 5%까지 낮추는 방안이다. 선거 문턱을 낮춰야 소수 그룹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선거에 뛰어들 수 있다.



 요즘 “국회를 해산하라”는 아우성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 불신을 엿볼 수 있다. 이는 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는 급속히 선진화됐는데 정치의 진화 속도가 사회 변화를 못 따라잡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회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특권’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이미 공공의 적이 된 ‘불체포특권’은 스스로 손질해야 할 것이다. 불체포특권의 표결 요건을 엄격하게 만들고, 투표를 공개투표로 전환해야 국회의원들이 다음 선거 때 유권자들의 심판을 의식하게 된다. 여야의 혁신위원회에서 논의 중인 정치인 출판기념회 전면 금지도 바람직하다.



 개헌에 앞서 위에 열거한 선거 및 정치자금제도만 개혁해도 한국 정치는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여야가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제인 한국에서 정치적 안정성을 크게 흔들지 않으면서 정치 선진화를 도모할 수 있다. 한국 정치는 고질적 난맥상으로 인해 개혁의 도마에 올라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동화에서도 한 어린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치면서 모두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 아이들 세대가 ‘벌거벗은 임금’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한국 정치가들은 스스로 제대로 된 옷을 차려입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유준호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산학협력단 단장·전 청와대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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