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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돈줄 묶다가 제 발 묶은 메르켈

중앙일보 2014.10.30 00:05 경제 1면 지면보기
[베를린 로이터=뉴스1]


“러시아 환란보다 독일의 경기 둔화가 더 두렵다.”

딜레마에 빠진 ‘베를린 컨센서스’
재정위기 겪는 남유럽국에
긴축 위주 처방 따를 것 요구
수출 텃밭 유로존 수요 줄어
독일도 침체, 마이너스 성장



 폴란드 중앙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파트리차 베냑이 지난주에 털어놓은 말이다. 그는 “러시아가 외환위기에 빠져 봐야 폴란드의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정도 줄어드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독일의 경제 침체는 비극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유럽의 희망이지 않았는가. 유럽 재정위기가 한창일 때 독일 경제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비쳤다’. 구제금융의 핵심 돈줄이기도 했다. 그 바람에 국내에선 ‘독일 경제모델’ 붐이 일기도 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글로벌 선도 중견기업인 ‘히든 챔피언’이 화두였다.



 그 뒤 1년 남짓 흘렀다. 지금 독일 경제는 전혀 딴판이다. 수출이 부진하다. 산업생산이 시원찮다. 제조업과 수출은 독일 경제의 주력 엔진이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요즘 독일이 유로존 침체를 막는 게 아니라 유발하는 듯하다”고 보도했다.



 전망도 밝지 않다. 독일 ifo경제연구소 전망지수가 7월 이후 넉 달 연속 떨어져 이달엔 98.3까지 낮아졌다. 100 아래면 경기 둔화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블룸버그통신은 “독일의 올 2분기 성장률은 -0.2%(전 분기 대비)였다”며 “3분기 성장률은 -0.2~0.3% 사이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라고 29일(한국시간) 전했다. 일반적으로 두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은 경기 침체로 통한다. 독일은 지난해 1~2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이번에 다시 침체에 빠지면 더블딥(경기 회복 뒤 재침체)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독일의 핵심 수출시장인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8개국) 수요가 급감한 탓”이라고 설명했다. 이웃 유로존 회원국들은 미국·중국과 함께 독일의 3대 수출시장이다. 요즘 유로존은 경기 침체와 함께 디플레이션 증상을 보이고 있다. 재정위기가 진정되면서 회복되던 경제가 다시 주저앉는 모습이다. 독일 텃밭이 망가지고 있는 셈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옌스 바이트만 중앙은행 총재가 (최근 경기 침체의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재 독일 경제 상태는 자신들의 경제 도그마가 낳은 어두운 그림자”라고 덧붙였다.



 크루그먼 교수가 말한 도그마는 바로 메르켈·바이트만의 재정긴축 위주 처방이다. 전문가들이 말하는‘베를린 컨센서스’다. 메르켈은 재정위기를 겪는 남유럽 국가에 재정긴축을 요구했다. 바이트만은 유럽중앙은행(ECB)에서 “남유럽 국가의 긴축의지가 약해진다”며 과감한 돈 풀기에 반대했다. 1990년대 미국 정치와 금융계가 한국 등 금융위기 국가들에 요구한 긴축 위주의 개혁조치(워싱턴 컨센서스)와 닮았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먼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긴축으로 남유럽이 침체와 디플레에 시달리는 바람에 독일 수출이 부진하다”고 분석했다. 독일의 자업자득이란 얘기다. 최근엔 남유럽 디플레가 독일로 전염되는 증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런 독일을 아눕 싱(현 JP모건 이사) 전 IMF 아태국장은 최근 본지와 인터뷰에서 “유럽 경제의 불안요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베를린 컨센서스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조짐이다. 블룸버그는 “이달 초 IMF 연차총회에서 수많은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ECB 등에) 과감한 경기 부양을 힘줘 말했지만 바이트만만이 ‘아직 위기를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태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미 금융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월스트리트 제국』에서 “당시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에 꿔 준 전쟁자금을 끝까지 받아 내기 위해 긴축을 강요하는 바람에 유럽 경제가 극심한 위기에 빠졌다”며 “그 후폭풍은 대공황의 악화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을 한 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 채무를 사실상 탕감해 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셜플랜 등으로 서유럽 경제 부활을 도왔다. 그 열매가 바로 현재의 독일이다. 전 국제금융협회(IIF) 사무총장인 찰스 달라라는 “독일은 미국의 지원으로 성장했는데도 메르켈 총리는 이런 역사적 교훈을 잊고 남유럽 국가에 긴축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르샤바=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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