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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 주원장의 책사, 유백온(劉伯溫)의 비가(悲歌)

중앙일보 2014.10.27 14:06
“제갈량은 천하를 삼분하였고, 유백온은 강산을 통일하였다네.”



민간에 떠돌던 얘기다. 유백온(본명 유기劉基, 1311~1375)은 장량, 제갈량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3대 책사로 꼽힌다. 그는 문장? 경서? 천문? 지리? 병법에 정통하였다. 유백온은 오늘날에도 중국의 서민들에게 많은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어느 날 평소 습관대로, 섬서성(陝西省) 모 사범대학 후문을 지키는 50대 중반의 경비원 장(張)씨에게 말을 걸었다. 장씨는 20여 년 전, 인천의 모 하수처리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다며 한국에서 온 이방인 선생을 반갑게 대했다.



마침 유백온이 등장하는 드라마, ‘주원장 전기’를 보고 나온 터라, 유백온이 누구며 유백온은 누가 죽였느냐고 슬쩍 물어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에 거품을 물고 그의 행적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유백온이란 인물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동료 경비원이 한마디 거든다. 주원장의 지시로 호유용(胡惟庸)이 유백온을 독살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백온은 밑바닥 사람까지도 벗하며 예찬하는 인물이다.



유기는 청전(靑田, 현 절강성 온주시溫州市 문성현文成縣) 사람으로서,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기억력이 비상하여 한 번 배운 내용은 잊지 않았다. 그에게 '신동'이란 별호가 따라 붙었다.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가 집정하던 1333년, 23세에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 오늘의 베이징)에서 치르는 회시에 합격하여 진사로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성품이 곧은 데다 몽고인과 색목인을 우대하는 원의 차별정책으로 홀대를 당했다. 한인(漢人)에 이어 제 4계급인 남인(남송인이 주류)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26세 때인, 1336년에 고안현 현승(高安縣 縣丞)으로 부임하여 원칙적인 일처리로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원 말기에 접어들자 사회가 매우 혼탁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한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미운털이 박혀 고초를 겪는 것이 유기의 숙명처럼 돼버렸다. 결국 몽고 관리와 지방 토호들의 모함을 받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청전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칭이 ‘유청전’이었다.



그 무렵 푸젠성(福建省) 해안 일대를 무대로, 소금 밀매업을 하던 방국진(方國珍)이 원 조정에 불만을 품고 거병하였다. 인재 기근에 허덕이던 원 조정은 다시 유기를 불러들였다. 유기는 방국진의 무리를 격퇴한 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천하통일을 꿈꾸던 주원장이 남경을 점령하고 백온의 고향에까지 세력을 넓혀 왔다. 그에게 주원장의 군대는 한낱 ‘비적’에 불과하였다. 그는 방국진의 반격에 대비하여 민병을 기르며 대세를 관망하는 한편, 출사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백온의 다음 글에, 포부를 펼치려는 그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 묻어난다.



“하늘과 땅 곳곳에 깃발이 가득 펄럭이는데, 고기 먹는 사람 어느 누가 고사리 먹는 사람에게 계책을 묻겠는가?(<감흥(感興) 3수(首)>, 오함 저, 박원호 역,《주원장전》, 130쪽 재인용)”



주원장은 휘하를 시켜 끈질긴 설득과 회유 끝에 유기를 그의 장막으로 불러들였다. 오랜 은거 생활을 청산하고, 그가 성토했던 ‘도적 무리’에 귀부(歸附)한 것이다. 세인들은 그의 초빙을 두고, ‘삼고초려’에 비유하기도 한다. 주원장은 그를 스승(老師)의 예를 다해 모셨다. 예현관(禮賢館)을 지어 유기, 송렴(宋濂)을 비롯한 현사들이 거처하도록 배려했다. 1860년, 주원장의 나이 33세, 유기의 나이 50세 때의 일이다. 이 때 유기는 천하의 형세와 안위를 언급한 이른바 ‘시무십팔책(時務十八策)’을 지어 바쳤다.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현자를 받드는 것이 정치의 요체다. 전쟁 중에도 농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밭을 가는 중에도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에 능한 자는 적정을 잘 살핀다. 천하를 얻으려는 자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得天下者, 得民心).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형벌을 가벼이 하고 세금과 부역을 덜어줘야 한다. 유교를 기초로 풍속과 기강을 바로잡고 백성의 교화에 힘써야 한다.



원 말 군웅이 할거하였다. 소금밀매업자 출신 장사성(張士誠)이 소주를 근거지로, 어부출신으로 힘이 장사에다 무예가 뛰어난 진우량(陳友諒)이 강서(江西) 일대에서, 주원장을 가운데 두고 동과 서에서 압박하였다. 진우량은 천하제패의 야심이 있는 자로서, 그의 세력 판도는 강서성? 호북성? 호남성? 광서성 일대에 달했다. 진우량의 군대는 병력의 수와 질, 병사의 사기 측면에서 모두 주원장의 그것을 압도하였다.《주원장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닭장 속의 닭처럼, 손만 뻗으면 ‘닭(주원장)’을 잡을 수 있는 형국”이었다.



주원장이 응천(應天, 남경) 막부에 도착한 유기에게, 진우량과 장사성 군대의 동향 등 적의 정세에 관해 묻자 그가 답하였다. 유명한 두 사람 간의 침실 밀의(密議)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위험한 주적은 진우량인데, 그는 정병과 대선을 보유하고 있는데다 우리의 상류에 버티고 있으며 야심도 큽니다. 진우량의 군대는 사기도 왕성하고 수군 또한 우수합니다. 먼저 힘을 집중하여 진우량을 쳐서 패퇴시키면, 장사성의 군대는 고립되니 단번에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책, 141~142쪽).”



주원장은 유기의 조언에 따라, 먼저 진우량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유기의 지략과 묘책이 진가를 드러냈다. 중국 최대의 담수호인, 이른바 ‘파양호(?陽湖) 혈전’에서 20만 군대로 진우량의 6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허위 정보 유포, 거짓 투항, 반간계, 유인, 허를 틈타 본거지 습격, 매복, 기만? 기습 및 화공작전을 구사하여 거둔 승리였다. 유기의 신책(神策)은 대부분 적중하였다. 주원장은 그를 “나의 장자방(吾之子房也)!”이라며 흡족해 하였다.



주원장에게 유기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파양호 전투에서 주원장이 탄 배가 진우량 군대에 의해 집중 포격을 받자, 주원장에게 속히 배를 갈아타도록 함으로써 죽음의 문턱에서 그를 구했다.



1367년, 주원장의 지시로 유기? 이선장? 도안(陶安) 등 20여 명이 법전의 제정에 착수하였다. 이듬해, 조선 500년을 지배한《대명률(大明律)》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1368년 명 왕조가 개국하였다. 건국 초, 유기 등의 건의에 따라 군위법(軍衛法)을 제정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국방과 민심의 안정을 꾀했다. 이 법에 의거, 병사들은 평소에 영농활동을 하고 전시에 전투에 투입돼 과도한 군사비 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강산은 바꿀 수 있어도 본성은 바꿀 수 없다(江山易改 本性難易).” 중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속담이다. 젊어서부터 원칙과 소신으로 일관했던 유백온에게 많은 적이 생겨났다. 장량을 자처했던 유백온의 대인관계는 매끄럽지 못했다. 유방의 고향 측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장량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는 절동(浙東, *영파寧波、소흥?興、주산舟山、태주台州, 온주溫州 일대) 지주집단으로 분류돼, 회서파(淮西派 *오늘날 안휘성 안경安慶, 하남성 광주光州, 호북성 황주黃州 일대)의 실력자인 이선장? 호유용 등으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았다. 이선장의 측근인, 탐관 이빈(李彬)이 법을 어기자 원칙대로 그를 처형하였다. 이로 인해 이선장 일파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어느 날 주원장이 이선장 후임으로 적절한 승상감을 찾던 중에 유백온을 불렀다. 주원장은 양헌(楊憲), 왕광양(汪廣洋), 호유용을 차례로 거명하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세 사람 모두 재목감이 못된다고 하였다. 특히, 호유용을 두고 이렇게 혹평하였다. “호유용을 가마를 모는 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말이 가마를 뒤엎어 버릴까 두렵습니다(譬之駕,懼其?轅也).”



주원장이 유백온을 적임자로 여겨 승상 자리에 앉히려 하자, 자신은 질투와 증오심이 많고 그릇이 작아, 번잡한 정무를 맡기에 부적절하다며 극구 사양하였다. 회서파가 장악한 명 조정에서 승상직을 감당하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결국 주원장은 유기의 충언을 무시한 채 호유용, 왕광양을 승상에 기용하였다.



자신이 배척했던 호유용이 요직에 오르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부인의 죽음을 구실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향한 그에게 횡액이 찾아들었다. 모욕을 당한 호유용이 그를 가만 내버려 둘리 없었다.



호유용이 주원장에게 그를 모함하였다. 유기가 지방관과 공모하여, 왕의 기운이 서려있는 담양(談洋) 땅에 자신의 묘를 세우려 한다는 것이었다. 담양은 소금밀매업자와 해적의 소굴이자, 방국진이 거병한 곳이었다. 유기는 병약한 몸을 이끌고 수도로 달려와서, 해명하기 위해 주원장을 알현하였다. 그러나 이미 주원장의 신임을 잃었고, 봉록도 박탈당했다. 병이 위중하자, 고향에 내려가 요양하다 65세를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쳤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추측이 무성하다. 주원장의 지시로 호유용이 살해하였다는 설, 호유용이 와병 중인 그를 방문하여 마시던 약에 독약을 타 넣어 죽였다는 설, 호유용이 자객을 보내 살해하였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푸원쥔? 왕페이훙(符文軍? 王飛鴻)이 역은《중국 명인 미해지미(中國名人 未解之謎》에도 그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가 일부 언급돼 있다.



어사중승(御使中丞), 홍문관 학사(學士) 등을 지낸 백온은 성의백(誠意伯)이란 작위를 얻었으며 후손에게 세습됐다. 한국공(韓國公) 이선장의 봉록이 4000석인데 비해, 그의 봉록은 240석에 불과했다. 그 스스로 개국공신으로서의 후한 예우를 사양한 탓이다. 세월이 흐른 뒤, 주원장은 내내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유기는 송렴(宋濂), 고계(高啓) 등과 더불어 ‘명초 시문 3대가’로 불린다. 유백온 관련 기록으로《명사(明史)? 유기전(劉基傳》,《성의백 문집(誠意伯 文集)》20권이 전한다. 이 문집에는 부(賦), 시, 사(詞) 등 1600여 수와 각종 글 230여 편이 수록돼 있다. 주요 저서로《욱리자(郁離子)》,《이미공집(犁眉公集)》,《백전기략(百戰奇略)》등을 남겼다. 아울러, 오함의《주원장 전》에도 그의 이름과 행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의 대표작인《욱리자》는 태평성대에 이르는 치국의 도를 서술한 것으로서, 원말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저술됐다. 우언(寓言)을 주로 사용한 일종의 산문집으로서, ‘욱리자’는 유기가 지어낸 이상적 인물이다. 내용은 개인? 가정? 사회? 정치? 군사? 외교? 신선술 등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였다.



유백온의 예견대로 그의 사후 5년 만인 1380년, 국법질서 문란, 권력 농단, 일본? 몽고와 사통했다는 죄목으로 호유용과 9족이 몰살됐다. 이른바 ‘호유용의 옥(獄)’이다. 이 사건에 연좌돼 죽은 자가 무려 1만5천~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호유용 사후, 10년 만에 77세의 이선장도 호유용 사건에 연루돼 처자식, 조카 등 70여 명이 죽었다. 오함의《주원장전》에 따르면, 주원장이 개국공신을 모조리 ‘학살’한 의도는 권력 독점에 있다고 하였다.



유기 사후, 두 아들도 비명에 갔다. 장남 유연(劉璉)은 호유용 당파와 충돌하여 내몰리다 우물에 투신해 죽었다. 차남 유경(劉璟)은 명 성조, 영락제 면전에서, “전하 백세 후 ‘찬?(찬탈)’이란 한 글자를 피해갈 수 없다(殿下百世后,逃不得一?字).”고 바른말을 하여 투옥돼, 옥중에서 목매 자살하였다. 유기 삼부자의 슬픈 이야기다.



유백온에 대한 후대 작가들의 평가는 천편일률적으로 매우 후하다. 리정(李政)은《권력의 숨은 법칙, <유백온과 주원장, 관리사회의 함정을 피하려거든 권력을 멀리하라>》에서, 유백온은 권력을 멀리하고 매사에 신중을 기한 덕분에 일족이 온전하게 살아남았다고 기술하였다. 그를, 권력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권력과 초연한 인물로 묘사한 것이다.

찌아원홍(賈文紅)은《중국의 인물열전》에서 ‘세상의 이치를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 본 인물’로 띄웠다. 홍문숙? 홍정숙이 엮은《중국사를 움직인 100인》에도 유백온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그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본 예언자’로 극찬하였다. 모두 유기를 신비스런 인물로 미화하거나 가공하였다. 이는 호사가들이 부린 ‘말재주’에 불과하다.



백온은 주원장을 15년 가까이 섬겼다. 권력은 ‘발갛게 달아오른 난로’와 같다. 그는 권력의 생리를 간파하고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권력을 ‘낚시 바늘에 꿰인 미끼’로 보고 경계하였다. 백온은 표변(豹變)을 일삼았던 주원장이라는 권력과 거리를 둬, 가까스로 일족이 몰살당하는 화를 면했다.



유백온은 사주나 명리학(命理學)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그가 상세하게 풀이한《적천수(滴天髓)》는 명리학의 고전이 되었다. 이 책은 명리학 입문자라면 누구나 한 권씩은 가지고 있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높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 유백온은 ‘처세의 달인’, ‘처세의 대가’로 통한다. 와전된 것 같다. 사주명리학자 김재원은, 유백온을 타고난 재주에 비해 관운이 약한 인물의 전형으로 꼽았다. 이 말의 이면에는 그의 굴곡진 벼슬길, 그리고 그와 두 아들의 슬픈 최후가 깃들어있다.



올곧은 성품으로 인해 화를 불러들였던 유백온은, 처세의 달인이 아니라 오히려 처세에 둔감했던 것 같다. 강직한 자는 악역을 맡게 되고 슬픈 운명을 맞이한다. 그에게, 공을 이룬 뒤 철저히 몸을 숨겨 한 몸을 잘 보존했던 유방의 책사, 장량의 지혜가 못내 아쉽다.



전 웨이난(渭南)사범대학 교수 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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