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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월요일] 시간을 먹다 ⑤-문학 다방의 어제와 오늘

중앙일보 2014.10.27 00:44 종합 14면 지면보기
시인 오은(왼쪽)과 용다방의 김지용 사장. 오 시인은 김 사장의 결혼식 사회를 봤다. [김경빈 기자]


서울 합정동 ‘용다방’은 시인 오은(32)에겐 작업실이자 도서관, 그리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만남의 장소다. 테라스의 반투명 폴리카보네이트 천장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풍경을 보며 시상(詩想)을 떠올리기도 하고 프랑스 철학책과 만화책, 시집들이 두서없이 꽂혀 있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새로 나온 시집을 김지용(36) 사장에게 건네자 그는 “형 시는 말장난이 심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오 시인은 뭔가 종이에 끄적였다. 6070세대에게 대학로 학림다방이 있듯, 요즘 젊은 문인들에겐 홍대·연남동·가로수길의 카페가 아지트 역할을 한다. 용다방엔 시인 이영주를 비롯해 소설가 이영훈·김탁환 등도 자주 찾는다. 오 시인은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소설가 은희경과 윤성희를 알아보고 술 한잔 기울인 적도 있다”고 했다.

학림부터 용다방까지, 시인의 핏줄엔 커피가 흐른다
유치진 등 구인회 아지트 ‘낙랑파라’ 6·25 후엔 김동리 머물던 ‘밀다원’
대학로 ‘학림다방’만 58년째 제자리 전혜린이 사랑했던 창가 그대로
요즘 문청은 홍대·가로수길 단골 카페는 문학 영감 불러일으키는 곳



 역사적으로 커피는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문화 융성기를 만들었다. 이교도의 음료로 치부되던 커피가 이탈리아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시기는 르네상스의 태동기와 겹친다. 이후 네덜란드-프랑스-영국으로 커피가 전파되면서 문화의 급진적 변화가 이뤄졌다. 시인 김정환(60)은 “커피는 시의 실핏줄”이라고 했다. 의학적으로 커피는 뇌의 혈관을 확장시켜 두통을 없애고 약간은 흥분시킨다.



 문화에 미친 커피의 영향력은 커피 그 자체의 힘이라기보단 커피를 먹는 장소, 즉 다방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몽테스키외는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커피를 만드는 상점이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들어가기 전보다 네 배의 지성을 가지게 된다고 믿습니다”고 적었다. 헤밍웨이·랭보·볼테르·루소가 문학과 철학, 역사를 이야기하며 서로의 예술혼을 자극했다는 파리의 르 프로코프, 괴테와 릴케가 출입했던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Florian)은 이렇게 커피와 대화를 팔았다. 에든버러의 카페 ‘엘리펀트 하우스’는 해리포터 시리즈로 대스타가 되기 전까지 가난한 미혼모였던 조앤 K 롤링에게 하루 종일 죽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했다.



 이들 카페가 자신이 배출한 문인들의 이름을 걸고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우리 문인들이 즐겨 찾던 커피하우스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영화감독 이경손이 연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 ‘카카듀’는 터조차 남아 있지 않다. 유치진·박태원을 비롯한 구인회(九人會) 멤버들이 줄곧 드나들었다는 명동의 ‘낙랑파라’, 이들과 반대되는 국내 문학파의 중심이었다는 ‘비너스’ 등은 일제시대 예술가들이 시간을 보내던 곳이다. 전후에는 김동리가 자주 찾았던 ‘밀다원’을 기반으로 6·25전쟁이 쓸고 간 폐허 속에서 문학을 꽃피웠다.



40년 단골인 김정환 시인(왼쪽)과 그와 26년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학림다방 이충렬 대표. [김경빈 기자]


 1956년부터 지금까지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학로 학림(學林)다방은 그래서 더 반갑다. 소설가 김승옥이 박태순과 김화영 교수를 앉혀 두고 한국일보 등단 작품인 ‘생명연습’을 읽히고 친구들의 평을 기다리며 초조해하던 곳, 수필가 전혜린이 사망하기 전에 창가 자리를 찾아 대학로를 내다봤던 곳이다. 2001년 이곳을 찾은 김지하가 남긴 방명록엔 “학림 시절은 내겐 잃어버린 사랑과 실패한 혁명의 쓰라린 후유증, 그러나 로망스였다”고 적혀 있다. 그 말처럼 70년대 민주화운동과 문학사를 압축한 곳이 바로 학림다방이다. 학림다방은 ‘서울시 미래유산’에 등록됐다.



 당시 카페가 학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낙산’에 가고 교수들은 주로 ‘대학다방’에 갔지만, 문리대(현 재의 인문·사회·자연대의 전신) 학생들은 꼭 이 ‘학림’을 찾았다. 이곳을 아지트 삼아 모여 술을 마시러 가고 문학을 이야기하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소설가나 시인, 음악가가 됐다. 시인 김정환은 “돈 없어서 가치담배를 피워도 커피는 마셨다”며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을 위해 종업원이 먼저 와서 주문을 받지 않는 분위기가 있어 돈이 없는 날도 개장부터 폐점까지 죽치고 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87년부터 학림을 맡아온 이충렬(59) 대표는 “요즘도 젊은 치들이 6~7시간 죽치며 무언가를 계속 쓴다”며 “7시간 지나 POS(매장의 판매시점관리시스템)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그때쯤에야 ‘배가 안 고프십니까’라고 묻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학림다방에 앉아 장기를 두는 도민준(김수현·왼쪽). [SBS 캡처]
 학림은 장소 자체로도 문화적 저력이 있다. 그리고 서구가 그랬듯이 다방은 관광문화의 자산이 된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김수현이 김창완과 창가 자리에 앉아 장기를 둔 이후 학림다방 앞에도 아침마다 중국 관광버스가 줄지어 선다. 파리를 찾은 소설가가 20년대로 돌아가 헤밍웨이 등 유명 문인들을 만난다는 내용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히트한 후에는 영화에 등장한 파리의 유서 깊은 카페·주점을 돌아보는 관광상품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로 인해 오래된 곳이 경쟁력을 잃지 않는 선순환도 일어난다. 학림다방 이 대표는 “(관광상품화는) 단골들에게는 썩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그래도 관광객들로 인해 늘어난 수입으로 노후화됐던 전기공사를 새로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학 다방의 커피는 어떤 맛일까. “학림다방의 커피는 낙후와 낭만을 혼동하지 않는 맛이다. 역사만 믿고 음악이나 커피를 소홀하게 여기지 않는다.”(김정환) “용다방 커피는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맛이다. 맛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필요 없이 시와 대화를 함께 즐기기 좋다.”(오은)



글=구혜진 기자, 이은정(단국대 중어중문) 인턴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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