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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차 달이니 가슴속 아름다운 글귀가 살아나네”

중앙선데이 2014.10.26 03:11 398호 26면 지면보기
도판 겸재 정선의 ‘백운동’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승소(李承召·1422~84)는 차를 즐긴 인물로, 수 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서거정과 쌍벽을 이뤘던 그는 김수온(1410~81), 강희맹(1424~83), 김종직(1431~92)과 함께 조선 전기의 사대가(四大家)로 손꼽힌다. 그의 자는 윤보(胤保)요, 삼탄(三灘)은 그의 호다.

<15> 삼탄 이승소

17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集賢殿 副修撰)에 임명된 것은 그의 나이 25세(1447년) 때의 일이다. 얼마 후 응교(應敎)로 승진된 그는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와 형조의 판서를 지냈고 좌·우참찬에 올랐다. 충청도 관찰사로 외직에 있을 때 병이 나자 임금(세조)은 그를 위해 약을 하사했다고 전하니 그가 얼마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그의 깊은 학문 세계는 예악(禮樂)뿐 아니라 병법에도 능했고 율·역(律·曆)에도 밝았다.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늘 청렴하게 살았다고 한다. 특히 시에 능했던 그가 성종과 함께 지은 연구(聯句·연작 시)는 그의 충심(忠心)을 드러냈다. 이러한 사실은 『국조보감』에 “성종 2년(1471) 왕께서 세 대비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당시 여러 종신(宗臣)들과 재상을 불러 술과 음악을 하사했다. 주흥(酒興)이 고조되자 왕은 친히 ‘태평한 오늘은 취해도 좋으리(昇平今日醉無妨)’라는 한 구절을 내려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을 청했다.

성종 앞에서 “편안할 때 위험 경계” 간언
이때 임금의 시에 화답한 것은 예조판서 이승소였다. 즉석에서 “임금님과 신하들이 한자리에 모이셨도다(魚水相歡共一堂)/예로부터 편안할 때엔 위태로움을 잊지 말라 경계하였으니(安不忘危古所戒)/다시 굳은 뿌리에 왕업이 매였음을 생각하리(更思王業繫苞桑)”라고 화답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말한 “천하가 모두 태평할 때 늘 위험을 생각한다(安不忘危)”라는 말은 『역경(易經)』에서 인용한 것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어려울 때가 아니라 오히려 태평성대를 누릴 때에 (위험이) 싹 튼다는 뜻이다. 따라서 음악과 술이 한껏 어우러진 연회에서 호방함을 드러냈던 성종의 호기(豪氣)와 이승소의 간언(諫言)은 당시 연회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이승소의 간언을 받아들였던 성종의 포용력은 이 시절이 성군의 시대였음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한편 그가 백운동에 올라 승경(勝景)을 노래한 시는 ‘백운동’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자신궁(紫宸宮)의 서쪽에 깊고 그윽한 골짜기(紫宮之西洞府幽)
오랜 세월 흰 구름이 신선(이 사는) 언덕 감췄구나(白雲萬古藏仙丘)
늙은 소나무에는 푸름 엉겨 장막으로 싼 듯하고(長松凝翠擁如帷)
돌 틈으로 흐르는 물, 조올 졸 푸른 구슬이 구르는 듯(石澗琤琮碧玉流)
백운 노인 여기에 집을 짓고(白雲老人來卜築)
굽어보니 속세가 물 위에 뜬 거품 같구나(俯視塵寰同一漚)
『삼탄집(三灘集)』 권9

백운동은 인왕산에 위치한다. 자궁(紫宮)은 임금이 계신 궁궐로 자신궁(紫宸宮)이라고도 한다. 경복궁 서편의 “그윽한 골짜기”였던 백운동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한양의 명소였다. 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은 아름다운 산수를 노래한 시를 남겼다. 우뚝한 장송(長松)은 하늘을 가리고, 돌 틈으로 “푸른 구슬이 구르는” 듯한 승경지. 이곳은 속진(俗塵)을 씻기에 족한 곳이었다.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다. “여기에 집을 짓고” 사는 백운 노인은 속세가 “물 위에 뜬 거품같이”보였단다.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곳. 선구(仙丘·신선이 머무는 곳)를 감추기 위해 오랫동안 흰 구름이 머물던 곳이 바로 백운동이다. 여기는 실로 낙토(樂土)였다. 지금이야 주변의 경관이 훼손되어 그 비경(秘境)을 헤아리기 어렵지만 계곡의 품새는 옛날을 요량할 수 있고, 다행히 겸재 정선의 ‘백운동’도 남아 있어 옛 자취를 짐작하겠다. 산수를 유람했던 선비들의 속내는 자연으로부터 호연지기를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 속에 머무는 건 속진을 씻기 위함이다.

한편 묵은 때를 씻기엔 목욕만 한 것도 없을 터이다. 목욕 후의 산뜻함을 노래한 ‘욕온천(浴溫泉)’에 “영천에 목욕을 하자 묵은 때 말끔해져 상쾌하지만(浴罷靈泉舊汚新)/흉중의 번뇌야 그대로 남아 있네(胸中熱惱依然在)”라고 하였다. 목욕이 흉중의 번뇌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도 “잠시 청량하고 산뜻한 맛을 누리(須借淸涼一味眞)”고자 했던 그의 삶은 실로 고단했던 듯하다.

고즈넉한 산사(山寺)를 찾아 일암 전 스님을 예방한 그의 뜻은 일미선(一味禪)의 여유를 나누고자 했던 셈이다. 일암 전 스님이 대접한 산차(山茶)에서 그가 받은 위안은 무엇일까. 그의 번뇌를 일시라도 사위어 들게 한 일암 전 스님에게 고마움의 증표로 지은 ‘일암전장로(贈一菴專長老)’는 일종의 증시(贈詩)이다. 다음과 같다.

백 년의 번뇌를 떨쳐 버리고(抖擻百年累)
일미선에 들었네(深參一味禪)
몸이 한가하니 응당 늙지 않을 것이고(身閑應不老)
고요한 마음엔 졸음조차 없으리(心靜更無眠)
대바구니 속엔 약(차)을 말리고(藥料筠籠曬)
차 솥엔 흰 눈(雪)으로 (차를) 달이네(茶鐺雪水煎)
제일 가련한 것은 속세의 객이(最憐塵世俗)
항상 몸이 얽매여 애쓰는 것이라(役役常在纏)
『삼탄집(三灘集)』 권5

일암 전 장로는 고승(高僧)이라 전해진다. 술과 바둑을 좋아했으며, 시문에 능했던 그는 신숙주·서거정·성삼문 같은 당대의 문인들과 교유했다. 이승소와도 깊이 사귄 그는 차에 밝았던 수행자였다. 그러기에 “대바구니 속엔 약(차)을 말리고/ 차 솥에는 흰 눈(雪)으로 (차를) 달인다”고 했을 것이다. 차를 만들고 음다(飮茶)를 주도했던 승려들과 선비들은 차를 통해 서로의 사귐이 돈독해졌고 시로 품은 뜻을 소통했다.

불교 폐해 지적하면서도 차는 즐겨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이 대세를 이룬 시대다. 이로 인해 불교는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세조 때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간행했지만 불교의 영향력이 다시 살아나지는 않았다. 척불론(斥佛論)이 우세했던 당시 이승소 또한 해불(害佛:불교가 풍속에 미친 악영향)을 논하는 글을 지을 정도였다. 따라서 불교의 위축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불교의 성쇠와 축을 같이한 차를 왕실에서 퇴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5세기 말 산사를 찾아 차를 나누던 풍속도 점점 줄어들고 실제 차를 즐기는 문인의 수도 현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풍요롭던 다사(茶事)를 노래한 시에서도 차를 즐기는 여유는 간결하게 표현된다. 당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이승소의 시에서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1480년 주문사(奏聞使)로 명에 갔을 때 지은 ‘고평(高平)’에 “폐를 적시려 서둘러 찻잔을 찾고(潤肺催茶椀)/시를 지으려 짐 뒤져서 붓을 찾네(題詩覓管城)”라는 표현도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차의 유익성이 감소된 것은 아니다. 메마른 정서를 일깨우고 번뇌를 삭여주었던 차의 효능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차의 본질이다.

그가 쓴 ‘전다연구(煎茶聯句)’는 당시 탕법(湯法)이 어떠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산골아이 절구질하여 차를 찧으니(山童敲茶臼)
월단차를 부수어 고운 가루로 만들었네(玉屑碎月團)
(끓이는 물에) 게 눈과 물고기 눈이 생기자 차를 달이니(煎出蟹魚眼)
수시로 가슴속의 아름다운 글귀가 살아나네(時澆錦繡肝)
시를 지으면 응당 귀신이 울겠고(詩成鬼應泣)
마음이 고요하니 번뇌가 일지 않으리(心定井無瀾)
석정의 뛰어났던 시 구절은(石鼎龍頭句)
예로부터 압도하기 어려웠지(從來壓倒難)
『삼탄집(三灘集)』 권7

월단(月團)은 둥근 달처럼 생긴 차이니 단차(團茶)를 말한다. 산에 사는 동자가 차 절구에 단차를 넣고 ‘고운 가루’로 만든다. 이는 포말(泡沫·차 거품)을 내기 위함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까지 이 다법(茶法)이 유행했다. 찻잔에 고운 가루를 넣고 강약으로 다선(茶筅)을 저어서 거품을 내면 백설(白雪) 같은 거품이 찻잔에 가득하다. 이 시에서 “게 눈과 물고기 눈이 생기자”라는 말은 찻물이 잘 끓었을 때다. 물이 끓는 정도를 이것으로 가늠하는데, 차를 달이기에 가장 좋은 상태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차를 마시면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만권 장서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하였으니 이는 차를 마신 후 일어나는 몸의 변화를 이르는 말이다. 바로 정신이 맑아졌음을 의미한다. 맑아진 정신과 고요해진 마음은 차를 즐기는 궁극의 목표이다. 번뇌가 일지 않는 상태, 적정(寂靜)은 차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지이며 혼연히 일치가 된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다.

그가 일출 직전의 바다를 바라보며 지은 ‘도중망해(途中望海)’에 “어슴푸레한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붉어지니(上下微茫爲一色)/어디가 물이고 무엇이 하늘인지 분간하기 어려워라(不知是水是天耶)”라 하였다. 일출 직전의 바다에서 그가 본 세계는 하늘과 바다가 일체가 된 경지가 아닐까.

“문장은 언어와 문자 사이에서 드러내는 것이기에 마음에 담아둔 것을 가릴 수 없다(形於言語文字之間者 不能掩胸中之所蘊也)”라고 한 것은 성현(成俔·1439~1504)이 ‘제삼탄집후(題三灘集後)’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문장은 나라의 기맥이다. 사람에게 기맥이 없다면 그 몸을 보존하지 못하고 병이 날로 깊어지며 나라에 기맥이 없으면 (나라에) 벼리가 없어서 통치가 날로 쇠해진다(文章者 國家之氣脈也 人無氣脈則無以保厥躬而病日深矣 國無氣脈則無以維其綱而治日卑矣)”라고 하였다. 이승소의 흉중이야 이미 그의 시문에 또렷하거니와 현대인의 문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장이 나라의 기맥이 될 수 있는지는 다시 살펴볼 일이다.



이승소는 저서 『삼탄집(三灘集)』을 남겼고, 신숙주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였다. 사후(死後)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로는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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