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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넘버2의 비애 … 최고 되기는 어렵고 사라지는 건 순간

중앙선데이 2014.10.26 03:32 398호 28면 지면보기
2011년 9월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오른쪽)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불출마를 밝힌 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포옹하고 있다. 예비 후보 1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지지율은 39.5%로 1위, 박원순 지지율은 3.0%로 5위였다. [중앙포토]
1등이 사라지면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할까. 2등이 새로운 1등으로 등극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③ 판도 바꾸는 패권 공백

지금으로부터 딱 35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현직 대통령이 시해된 것이다. 그 절대 권력자를 이어 누가 새로운 권력자가 됐나. 정치권에는 3김씨를 비롯한 여러 대권주자가 있었고, 행정부 쪽에도 최규하 총리 등 후계자로 거론되던 인사들이 있었다. 10개월의 혼란을 겪은 후 실제 정권을 잡은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10·26 사태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라지면 전두환 소장이 최고 권력자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10·26 사태 이전에 전망했던 사람은 없다. 대통령 시해의 주도자, 즉 당시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조차 전두환의 권력 장악을 예상치 못했다. 이처럼 권력 공백 이후 새로운 패권은 애초 후보군에도 끼지 못하던 쪽이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0·26 직후 3김씨는 대체로 낙관적 모습을 보였다. 같은 해의 12·12 군사반란 이전과 이후 다 그랬다. 세를 모으기 위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지만. 민주화는 8년이 더 연기되었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데도 적어도 1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김재규의 행동 역시 자신이 결코 의도하지 않은, 전두환 정권의 등장을 초래했다. 세상을 바꾸긴 했지만 자신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였다. 즉 전략적 사고가 없었다.

투표의 사례를 살펴보자. 3년 전인 2011년 10월 26일 실시된 서울시장 선거다. 당시 오세훈 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관련, 사퇴해 실시된 보궐선거다. 오 시장 사퇴 선언 직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명숙, 나경원, 추미애, 박영선 정도가 다음 서울시장으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다가 안철수의 출마 가능성 보도 이후의 여론조사들은 안철수, 나경원, 한명숙, 박원순 순의 지지도를 발표했다.

오세훈 사퇴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2, 3, 4등을 달리던 정치인들이 오세훈 사퇴 이후 각각 1, 2, 3등으로 한 단계씩 올라가지 못했다. 또 안철수의 불출마 직전에 2, 3, 4등으로 평가받던 후보들이 안철수의 불출마 이후 각각 1, 2, 3등으로 되지도 못했다. 2011년 선거의 당선자는 박원순 후보였다. 안철수 불출마 전에는 빅3에 포함되지 못했던 그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후보 간 경쟁 결과는 다른 후보가 있고 없음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특히 1인1표의 다수결에서는 본래 특정 후보에게 갈 표가 다른 후보에게 가기도 하고, 특정 후보에게 가지 않을 표가 별다른 후보가 없어 그 특정 후보에게 가기도 한다. 다른 후보의 유무에 따라 각 후보의 득표가 달라지니 당선자도 달라진다.

사람들은 한 후보에게만 표를 주는 방식보다 각각의 후보에게 차별화된 표나 점수를 주는 방식이 복잡하지만 더 낫다고 보기도 한다. 얼마나 좋고 싫으냐가 반영될 수 있고, 특정 후보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실제로 각종 콘테스트와 외국 의회선거에서 채택되고 있다.

각 유권자가 가장 덜 좋아하는 후보에게 0점을, 그리고 한 단계씩 좋아할수록 단계당 1점씩 더 준 후 가장 많은 총점의 후보가 선출되는, 이른바 ‘보다 방식(Borda count)’으로 서울시장을 선출했다고 치자. 그럼 안철수의 불출마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설명의 편의상, 서울시민이 10명이고 아래와 같은 후보 선호도를 갖고 있다고 임의로 가정해보자.

ⓐ(1명) 안>나>박 (시민 ⓐ는 안철수·나경원·박원순 순으로 선호하며, 3인이 출마한 점수투표제에서 안 후보에게 2점, 나 후보에게 1점, 박 후보에게 0점을 줌)
ⓑ(3명) 안>박>나
ⓒ(3명) 나>안>박
ⓓ(3명) 박>나>안

10명이 3인의 후보에게 점수투표를 실시한 결과 세 후보는 아래와 같은 총점을 받는다.

안: 2점×4명(ⓐ+ⓑ)+1점×3명(ⓒ)=11점
나: 2점×3명(ⓒ)+1점×4명(ⓐ+ⓓ)=10점
박: 2점×3명(ⓓ)+1점×3명(ⓑ)=9점

따라서 위 가정하에서 세 후보가 출마했다면 총점은 안철수, 나경원, 박원순 순이었고 안철수가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는 출마를 접었다. 그렇다면 10명 시민의 후보 선호도는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된다.

ⓐ(1명) 나>박
ⓑ(3명) 박>나
ⓒ(3명) 나>박
ⓓ(3명) 박>나

안철수가 빠진 이후 나경원은 ⓐ+ⓒ의 4명에게 1점씩 받아 4점을 얻고, 박원순은 ⓑ+ⓓ의 6명으로부터 6점을 얻는다. 박원순이 나경원에게 6대4로 승리한다. 즉 안철수의 불출마 이전에 3등을 했던 박원순이 안철수의 불출마 이후에는 2등에게 역전해 1등에 오른 것이다. 따라서 당선을 위한 박원순의 핵심 전략은 안철수의 불출마였다. 실제 선거일 50일 전 안철수와 박원순은 짧은 회담을 하고 박 후보로의 단일화를 발표했다.

1등의 공백은 종종 판 바꾸기로 연결된다. 그 판 바꾸기로 기존 서열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판 바꾸기는 애초에 불리한 측에게 더 유혹적인 전략이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경원 후보의 1억원대 피부클리닉 출입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그런 이슈를 그의 감표 요인으로만 보는 것은 단선적이다. 억대 피부과 이슈는 나경원과 박원순 간의 양자대결의 판을 바꾼 것이기도 했다. 기존 판에다 극소수 특권층 대 나머지, 즉 1 대 99라는 새로운 이슈를 추가한 것이다.

<그림 1>은 억대 피부과 이슈 등장 이전 두 후보와 10명 유권자의 입장을 기존 판인 가로축 위에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선 유권자 40%(①, ②, ③, ④)가 박원순을 더 가깝게 느낀 반면, 60%(⑤, ⑥, ⑦, ⑧, ⑨, ⑩)는 나경원을 더 가깝게 생각했다. 즉 나경원이 박원순에게 6대 4로 승리할 판세였다.

<그림 2>에서는 억대 피부과 이슈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가로축 외에 세로축인 1대 99의 이슈가 추가되었다. 그 새로운 이슈에서의 유권자 입장이 드러났다. 물론 기존 가로축에서의 유권자 입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선거판에서는 유권자 60%(①, ②, ③, ④, ⑤, ⑥)가 박원순을 더 가깝게 느꼈다. 따라서 박원순은 40%(⑦, ⑧, ⑨, ⑩)의 지지를 얻는 나경원에게 6대 4로 승리하게 되었다. 당시 여론조사들은 안철수와의 단일화로 급상승한 박원순의 지지도가 이후 조금씩 하향하는 추세였고, 나경원의 지지도는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였는데, 억대 피부과 이슈 등장과 함께 흐름이 뒤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억대 피부과 이슈는 일종의 스캔들이다. 그 스캔들은 흠결의 크기만큼 지지율 감소를 초래했다기보다 1 대 99와 같은 새로운 이슈의 추가에 따라 판이 바뀐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경원이 피부클리닉에 지불한 액수가 수백만원에 불과하다고 밝혔지만 지지도를 회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등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공백도 새로운 1등의 향방에 영향을 준다. 앞서 가정한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이 불출마하고 대신에 안철수와 나경원이 양자대결을 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서울시민 10명의 선호는 다음과 같이 재정리된다.

ⓐ(1명) 안>나
ⓑ(3명) 안>나
ⓒ(3명) 나>안
ⓓ(3명) 나>안

이 경우 안철수가 4명(ⓐ+ⓑ)에게서 1점씩 총 4점을 받는 반면에, 나경원은 6명(ⓒ+ⓓ)으로부터 1점씩 총 6점을 받게 된다. 본래 2등이었던 나경원이 3등의 불출마로 1등이었던 안철수에게 승리하는 경우다. 즉 3등의 공백도 1, 2등 사이의 우열관계를 뒤바꿀 수 있다.

이를 다른 역사적 사건으로 살펴보자. 105년 전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날이다. 안 의사의 의거는 일본 내 권력 향방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토가 권력에 가까이 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오쿠보 정권’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피살(1878년)이었다. 오쿠보의 경쟁자들이 아닌, 이토가 오쿠보의 자리를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후 이토는 1885년 초대 내각 총리대신을 시작으로 1901년까지 네 차례나 총리직에 올랐다. 그러다 1903년 이토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입헌정우회 총재직에서 밀려났다.

안 의사 의거 당시의 일본 정국은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두 사람이 번갈아 총리를 맡을 정도로 서로에게 1, 2등의 경쟁자이자 협력자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사이온지는 이토와 함께 온건파였고, 가쓰라는 강경파라 할 수 있다. 당시 사이온지의 정우회가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8년에 들어선 2차 가쓰라 내각의 수명은 짧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10년 5월 일본에서는 다수의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메이지(明治)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검거되었다. 이른바 대역(大逆)사건이다. 안 의사 의거가 그 모의의 출발점이었다는 주장, 또는 가쓰라 내각이 날조한 사건이었다는 주장이 오늘날까지 제기되고 있다. 진실이 어떠하든 이토의 피살은 결과적으로 2차 가쓰라 내각을 더 연장시켰다. 1, 2등이 아닌 이토가 사라지면서 1, 2등 간의 경쟁 판도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최근 여러 조사기관에서 차기 대권주자에 관한 지지도를 발표하고 있다. 각 후보의 지지도는 앞으로 부침을 거듭하고, 또 그 지지도 순위는 다른 주자가 있고 없음에 따라 크게 변동할 것이다. 어떤 강력한 차기 후보가 다음 대권을 잡는다는, 이른바 대세론은 현실화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대세론의 주인공이야 판을 유지하려 하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스캔들도 일종의 판 바꾸기다. 스캔들은 지지를 감소시키기 때문만이 아니라 판을 바꾸기 때문에 매우 파급적이다.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스캔들조차 판세에 큰 영향을 끼친다. 현 상황이 유리한 측은 어떻게 판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할 것이고, 불리한 측은 새로운 프레임(frame)을 들고 나와 판 바꾸기 전략을 구사하려 할 것이다.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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