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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교양 겸비한 불량배” … 재목 알아본 장징장

중앙선데이 2014.10.26 03:35 398호 29면 지면보기
총리 시절 전인대 상무위원장 둥비우(董必武)와 함께 랴오중카이(廖仲愷)의 무덤을 찾은 저우언라이(周恩來·오른쪽 둘째). 가운데 흰 양복 입은 사람은 랴오중카이의 아들 랴오청즈. [사진 김명호]
운도 따라야 하지만, 일단은 내부투쟁에서 승리해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 남을 대형사건을 저지른 사람은 다들 그랬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97>

북양군벌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전국을 통일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권력기반은 황푸군관학교였다. 모스크바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장제스가 쑨원(孫文·손문)에게 고분고분했더라면 황푸군관학교 교장 자리는 다른 사람 몫이었다.

운도 따랐다. 교장 취임 1년 후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와 쑨원이 5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장제스의 군권 장악은 불가능했다. 쑨원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보던 장제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권좌에 올랐을 경우 국·공 양당으로부터 국부(國父)로 추앙받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장제스는 돌멩이 하나로 토끼 세 마리를 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1924년 1월, 쑨원은 소련에서 귀국한 장제스를 ‘육군군관학교 주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했다. 장제스는 ‘주비(籌備)’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갓 살림을 차린 천제루(陳潔如·진결여)에게 불평을 늘어놨다. “쑨원은 나를 시험대에 올려놨다. 학교 만드는 일만 시켜먹고 교장은 직접 할 생각이다. 당장 때려치우겠다.” 국민당 내에서 장제스의 서열이 100위 안에도 못 들 때였다.

장제스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광저우를 떠났다. 부인 천제루를 앞세워 상하이에 있던 장징장(張靜江·장정강)을 찾아갔다. “쑨원은 나를 종으로 안다. 내게 주비위원장을 맡기고 교장은 쉬충즈(許崇智·허숭지)에게 맡길 심산이다. 나 보고 부교장을 하라니, 삼류 군벌 밑에서 노예 노릇은 못한다”며 씩씩거렸다. 쉬충즈는 지방군벌 출신이었다. 망명 시절 쑨원의 혁명자금을 도맡다시피 했던, 혁명성인(革命聖人) 장징장은 경악했다.

장제스 부부와 장징장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장징장의 네 번째 부인의 친구였던 천제루는 장징장과도 유별난 사이였다. 몇 년 전 장징장의 집에 놀러 왔던 장제스가 천제루를 발견하자 “저 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다”며 장징장을 졸라댔다. 천제루는 “도박과 화류계에서 헤매는 사람”이라며 장제스를 싫어했다. 장제스를 총애하던 장징장은 천제루를 달랬다. “지금은 평화시대가 아니다. 장제스는 교양을 겸비한 불량배다. 난세에는 저런 사람이 큰일을 한다. 당장은 팔난봉꾼 소리를 듣지만 언젠가 엄청난 일을 할 테니 두고 봐라. 황제가 되고도 남을 재목 감이다. 뭐를 줘도 아깝지 않다”며 장제스의 방에 밀어 넣었다.

상황을 파악한 장징장은 장제스를 안심시켰다. “내가 쑨원과 담판을 하겠다. 일단 고향에 가 있어라.” 장징장의 편지를 받은 쑨원은 난처했다. 군관학교 주비 임무를 최측근인 랴오중카이에게 맡겼다. 쑨원의 의중을 파악한 랴오중카이는 장제스에게 전문을 보냈다. “빨리 광저우로 복귀하기 바란다.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중임을 맡을 수밖에 없다.”

장징장의 노력이 주효했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이제 군관학교 교장을 맡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랴오중카이에게 짤막하고 정중한 답신을 보냈다. “단 하루도 광저우의 일이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장제스는 시간을 끌었다. 초조해진 랴오중카이는 쑨원에게 하소연했다. 쑨원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애초에 군관학교 교장감으로 지목했던 쉬충즈를 장제스의 고향에 파견했다. 장제스를 만난 쉬충즈는 속내를 털어놨다. “나는 군관학교 교장 자리에 관심이 없다.” 숨통이 트인 장제스는 광저우로 복귀했다.

쑨원과 랴오중카이 사후 황푸군관학교를 장악한 장제스.
1924년 5월 3일, 쑨원은 정식으로 장제스를 황푸군관학교 교장 겸 대원수부 참모장에 임명했다. 랴오중카이에게는 군관학교의 당대표를 맡기고 자신은 군관학교 총리직을 겸했다. 여기서 총리는 요즘의 대학교 이사장 정도로 보면 된다. 장제스의 학내 서열은 쑨원과 랴오중카이 다음이었지만, 쑨원은 인사권과 재정권을 달라는 장제스의 요구를 수락했다.

쑨원이 랴오중카이를 군관학교 당대표에 임명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랴오중카이는 국민당 좌파의 실질적인 대표였다. 무기와 경비 등 소련의 지원이 절실할 때였다.

랴오중카이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연하의 장제스를 먼저 찾아와 머리를 숙였다. “나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만 구걸해 오겠다. 집행은 네가 해라. 생도 교육에도 관여하지 않겠다. 네가 전담해라. 교관 선정도 네 몫이다. 나도 가끔 추천은 하겠지만 최종 결정은 네가 해라. 나는 서명만 하겠다.”

실제로 랴오중카이는 그렇게 했다. 광저우의 자본가들을 찾아 다니며 온갖 굴욕을 감수했고, 아편에 취한 시골 군벌 앞에 무릎을 꿇고 무기와 탄약을 구걸해 장제스에게 갖다 줬다. 생도들의 급식비를 위해 부인의 패물을 들고 전당포를 출입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면식도 없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지원서에 군말 않고 서명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군관학교의 기틀이 잡힐 무렵 랴오중카이가 암살당했다. 쑨원마저 세상을 떠나자 황푸군관학교는 장제스의 독무대가 됐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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