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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마케팅] 새 옷 사지 말고 꿰매 입어라 … 반짇고리 주는 의류업체

중앙선데이 2014.10.26 02:28 398호 20면 지면보기
운전석 두 여성의 대조적인 행동을 통해 과시성 소비를 비꼰 자동차 브랜드 볼보의 TV 광고 장면. [사진 비즈니스인사이더]
우리 제품을 사지 말라고 강조한 의류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광고와 파타고니아 설립자를 커버스토리로 게재한 포춘지.
신호등 앞에 멈춰선 두 대의 차. 각각의 운전석에 앉은 두 여인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메르세데스를 탄 여인은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 듯하다. 반면 볼보를 탄 여인은 갑자기 두 눈을 가운데로 모으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뒷자리 아이들 사이에 “까르륵~” 웃음이 터진다. 그러고는 “볼보는 아무나 탈 수 있는 차가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타는 차입니다”는 카피가 이어진다.

④ 非과시, 非소비 시대

볼보는 미국에서 메르세데스·BMW와 함께 고급 자동차 브랜드로 인식돼 왔다. 지난 수십 년간 광고전략도 소수의 고객을 대상으로 탁월한 제품 성능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럭셔리 컨셉트를 앞세워왔다. 그러다 2013년부터 ‘상위 1%에 속하거나 그렇게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우리는 적합한 선택이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볼보는 ‘당신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어울린다고 강조함으로써 고급차는 부유층만을 위한 차라는 통념에 뒤집기를 시도했다. 역발상은 지면 광고 카피에서 더 두드러진다. “당신의 강아지가 옷장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집사에게 집사가 있다면, 아마도 볼보는 당신을 위한 차가 아닐 것입니다”라며 마케팅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볼보의 새 광고를 “튀어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고소득층을 겨냥한 유쾌한 시도”라고 평가한다.

미국 고소득층 중에는 절제된 생활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쿠폰을 챙겨 쓰고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며, 합리적인 가격대의 와인을 즐기는 부자들이다. 특히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신의 노력으로 돈을 모은 부자일수록 수백만 달러 주택이나 고가 명품 브랜드에 열광하지 않는다. 백만장자 시리즈 책을 냈던 미국의 부자 전문가 토머스 스탠리 박사의 조언처럼 “진짜 부자처럼 보이고 싶다면 먼저 검소하게 행동하라”를 실행하는 부류다.

미국·일본 과시성 소비 거품 걷혀
자산 100만 달러(약 10억6000만원) 이상 부유층이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일본에서도 과시성 소비의 거품이 걷힌 지 오래다. ‘닛케이비즈니스’가 연 수입 1500만 엔(약 1억4700만원) 이상인 고소득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이 스스로를 부자라고 여기지 않았고 별장·고급시계에 관심을 가진 비중도 20% 미만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지갑도 굳게 닫혔다.

2000~2011년 일본의 전체 소비시장 규모가 230조~240조 엔(약 2250조~2350조원)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는데 반해, 고소득층의 소비는 20조 엔에서 12조 엔으로 대폭 감소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소득 상위 20% 가구의 소극적인 소비성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실질가처분소득에서 식료품·의류·교통·통신비 지출을 뺀 소비여력 규모가 2008년 월평균 228만원에서 2014년 281만원으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중산층의 소비여력은 큰 변동이 없고 저소득층의 경우 오히려 적자 폭이 커진 양상과 대조적이다. 구매력은 충분하지만 돈쓰기에 인색한 소비층이 두터워졌다는 이야기다.

명품 브랜드에 대한 수요도 예전 같지 않다. 세계 명품시장은 신흥시장 소비열풍 덕에 2011년까지 두 자릿수 성장률을 유지해왔지만 2013년 총 매출이 2170억 유로(약 290조원)로 전년 대비 2% 늘어나는 데 그쳤다. 특히 지난해 한국 명품시장 규모는 1% 성장한 83억 유로(약 11조원)였는데, ‘큰손’ 요우커들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실제 국내 고급품 시장은 성장이 정체된 상태다.

1990년대 이후 수차례의 경제 위기를 겪으며 안정적인 수익, 자산 보존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 고소득층은 새로운 상품이나 마케팅 자극에 보수적으로 반응한다.

미국의 전형적인 고소득 업종인 금융기관 종사자의 경우 업계 경쟁이 치열해지고 보너스가 줄어들면서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쇼핑을 즐기지 않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국에서는 명품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기보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을 수선해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 관련 시장이 커지고 있다.

이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 데는 갖고 싶은 물건을 손에 넣는 쇼핑의 흥분감이 줄어든 이유도 있다. 누가 봐도 알 만한 ‘3초 백’ ‘5초 백’에 대한 욕망은 시들해지고, 대신 싸고 질 좋은 제품을 발견하는 데서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 명품 브랜드보다 저렴하지만 품질이 좋고 디자인이 개성적인 컨템퍼러리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져 백화점에는 전문관이 생기고 매장 매출도 20% 이상 증가하고 있다. 명품 열망(aspiration) 집단이 축소되면서 고급시장은 웬만한 환경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수퍼리치와 합리적 고소득층으로 이원화되는 중이다.

미국에선 옷 6벌 이하 입기 운동
젊은 층 사이에서 나타나는 변화도 심상치 않다. 불필요한 소비를 경계하며 소비 축소를 지향하고, 간소한 삶을 체험하는 이벤트에 참여하는 소비자도 늘고 있다. 미국에서는 ‘옷 6벌 이하 입기 운동(Six Items or Less)’이 나타날 정도다. 한 달 동안 속옷·액세서리·신발을 제외하고는 6벌 이하의 옷으로 생활하자는 캠페인이다. 의류소비를 줄임으로써 ‘쇼핑 다이어트’를 하자는 게 이 캠페인의 목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참가자들(Sixers) 대부분이 “주변 사람들 대다수가 내가 단 6벌만의 옷만 입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말한 점이다. 이 캠페인은 낭비를 줄이는 아이디어에 관심이 많은 도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홈페이지나 트위터를 통해 번져나가고 있다.

일본에서는 소비를 어리석거나 나쁜 행동으로 여기며, 극단적인 청빈·검소 생활을 추구하는 혐(嫌)소비 세대까지 등장했다. 79년 이후 출생한 이들은 이제 중장년층이 된 ‘버블 세대’나 ‘단카이 주니어 세대’와 달리 어린 시절부터 한신대지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경제·사회적 대사건을 겪으며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성향을 다져왔다. 수입이 충분하더라도 최대한 절약하거나 계획적으로 소비하는 편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의 준말)’라는 단어가 최근 10, 2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다. 제품 리뷰나 비교 사이트에는 “가성비가 짱”이라거나 “가성비가 쓰레기”라는 글이 주를 이룬다.

개념주의 예술가 바버라 크루거가 만든 슬로건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에서 드러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를 표현하고 남과 구분하기 위한 소비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새롭고 희소한 상품에 대한 열망도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은 ‘무엇이 인생에서 중요한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어려움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소비자의 가치관과 행동의 변화는 앞선 세대가 일시적인 경제적 고충 때문에 소비를 줄이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르다.

화려한 삶보다 절제된 생활을, 물질적 소유보다 정신적 만족감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시장을 서서히 바꾸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여력이 풍부한 고소득층이 소비시장 활성화에 나서지 않는다고 푸념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새로운 접근법을 찾아야 한다.

경제 성장기에 지갑이 두터워진 중산층을 겨냥한 ‘매스티지 브랜드(대중적 명품)’가 출현했다면, 지금은 비과시적 고소득층의 ‘고급스러운 소박함’을 만족시킬 수 있는 브랜드와 상품이 필요한 때다. 소유를 통한 자부심, 자기 만족감을 부추기기보다 안전·안심이란 본질적인 니즈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우선일 수 있다. 거창하고 현란한 VIP 마케팅은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실용성·합리성 강조하는 전략 필요
따라서 브랜드 메시지도 제품과 서비스의 상징적·과시적인 측면보다 실용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구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어본 후 식욕을 잃은 기성세대와 달리 어린 시절부터 간소한 생활이 몸에 밴 젊은 층을 대할 때에는 ‘소비의 즐거움’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생산과 소비는 환경을 해치는 행위이니 우리 옷도 사지 말고 수선해 입어라”며 반짇고리를 나눠주는 미국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행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회사의 설립자이자 세계적인 암벽 등반가인 이본 취나드는 과소비가 꼴불견으로 여겨지는 세상 만들기를 미션으로 삼는다. 이런 파타고니아를 일컬어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은 ‘지구상에서 가장 쿨한 회사(The coolest company on the planet)’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고소득층과 젊은 층은 소비시장을 견인하는 쌍두마차다. 조금 느리게 걷거나 뛸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다급하게 채찍질을 하거나 아무 음식이나 먹인다면 당장은 달릴지 몰라도 어느새 또 멈춰 설 것이다.

이들이 오래도록 신나게 잘 달릴 수 있도록 하려면 드러나지 않는 과거의 상처, 속마음까지 깊이 이해하고 건강한 제품과 서비스를 정성스럽게 준비해야 한다. 소비자들의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까지 지지해주는 성숙한 마케팅이 필요한 때다.



최순화 소비자학을 공부했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석사 학위를, 퍼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근무했다. 현재 국내외 소비시장 트렌드 분석, 브랜드 관리 전략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반감고객들』(2014), 『I Love 브랜드』(공저, 201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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