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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피해자” 우기던 푸이, 일제 만행 확인하고 통곡

중앙선데이 2014.10.05 02:57 395호 29면 지면보기
1959년 겨울, 특사로 풀려난 푸이(가운데 안경 쓴 사람)는 한동안 베이징에 있는 다섯째 여동생 윈신(앞줄 오른쪽 첫째)의 집에 머무르며 형제·친척들과 어울렸다.  [사진 김명호]
소련에서 압송된 푸이(溥儀·부의)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도 피해자다. 어디를 가나 일본의 감시를 받았고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다. 일본 군부가 무슨 악행을 저질렀건 나와는 무관하다”며 결백을 굽히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94>

전범관리소는 두 눈으로 확인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푸이가 입소한 날부터 관리와 심문을 맡았던 조선족 청년의 회고를 소개한다.

“푸이는 만주국 황제 시절 동북의 3000만 민중이 겪었던 고초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선 푸순(撫順) 주변부터 참관시켰다. 숙정(肅正)과 토벌(討伐), 집단학살의 현장을 보여주자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에게 저항하다 희생된 동북항일연군의 기념관을 참관한 날은 실성대곡했다.”

푸이도 기록을 남겼다. “일본이 중국에서 범한 악행은 모두 나의 결재를 거친 것들이었다. 내 죄가 얼마나 큰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특히 조선인 이홍광의 활약은 나도 기억이 났다. 만주국은 죄악 덩어리였다. 집단학살은 둘째치고라도, 만주국 감옥에서만 2005명이 사망하고 420명이 내 손을 거쳐 사형대에 섰다. 고문으로 죽은 사람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내가 만주국 황제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모골이 송연했다. 내 눈으로 본 현장은 3000만 동북인들의 나에 대한 공소장이었다.”

만주국 황제 시절 군복을 착용한 푸이. 연도 미상.
농촌 부인들의 진술은 푸이를 감동시켰다. 상심이 극에 달했던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했다. 노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실토했다. “모든 고난의 원인은 만주국 황제라는 놈 때문이다. 내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나는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푸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는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푸이를 살리기로 결심했다. 푸이를 개조시키라고 지시하며 옆에 있던 예젠잉(葉劍英·엽검영)에게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거론했다.

“20년 전, 시안(西安)에서 장쉐량은 푸이를 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주먹으로 책상을 친 적이 있었다. 지금 장쉐량이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푸이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예젠잉이 “장쉐량도 총리의 결정에 동의했을 것”이라고 하자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훔쳤다.

전범관리소는 5년 만에 자신의 죄를 인정한 푸이를 정식으로 검거했다. 관리소에서 감옥으로 이감된 푸이는 자신이 개조 대상이 된 줄을 몰랐다. 법정에 설 날을 기다리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사마천(司馬遷)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 사는 세상에 용자와 겁자,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다. 일단 감옥에 갇히고 보니 옥리(獄吏)의 그림자만 봐도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루는 일본인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 나갔다. 재판정 분위기가 의외로 관대하자 삶에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사람답게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가족과의 서신 왕래를 허락한다는 공고문을 본 푸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이라는 두 글자가 생소했다. 3살 때 청 제국 황제의 보위에 오른 후, 한번도 가족이 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신하는 있어도 가족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나는 가족이나 친척들의 생사에 관심이 없었다. 당장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그날 밤, 먼 옛날얘기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10년 전, 헤어진 리위친(李玉琴·이옥금)의 소식이 궁금했다. 제일 먼저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리위친이 푸이의 부인이라며 면회를 요청하자 전범관리소 감옥은 긴장했다. 소장이 직접 리위친을 맞았다. 푸이가 황제 시절 선택한 복귀인(福貴人)인 것을 확인하자 두 사람 사이를 부부로 인정했다. 정치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조건으로 만남을 허락했다.

푸이를 만난 리위친은 눈앞에 벌어진 정경이 믿기지 않았다. 훗날, 기록을 남겼다. “남편 푸이는 내가 들고 간 싸구려 사탕과 과자를 정신없이 먹어댔다. 내게는 먹어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황제는 젊고, 준수하고 총명했다. 군복을 입으면 청년 장군의 위용이 넘쳤다. 사탕을 씹는 푸이를 보며 내 나이를 생각했다. 당시 나는 27세, 푸이는 50대 중반이었다. 면회를 마친 후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감옥 문을 나섰다. 소장에게 푸이는 수형자가 아니라 개조 대상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창춘(長春)으로 돌아온 리위친은 틈만 나면 푸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도 어김없이 왔다.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필체가 유려하고 문장도 아름다웠다. 책 이름을 열거하며 사 보내라고 했지만 리위친은 돈이 없었다.

푸이와 서신 왕래가 계속되고, 푸순을 몇 차례 왕래하자, 리위친이 근무하던 도서관에서 일이 터졌다. 혁명시절 머리 깎고 말 위에 앉은 저우언라이의 사진을 본 리위친이 동료들에게 별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 “총리가 대머린가 보다.”

별것도 아닌 내용이었지만 리위친이다 보니 시빗거리가 됐다. 연일 비판대회가 열렸다. “아직도 황제의 부인이었던 추악한 역사를 잊지 못한다. 봉건사상의 노예답게 무산계급의 영수를 무시했다. 이혼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치욕이 뭔지를 모르는 여자다. 당장 도서관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리위친은 네 번째 면회에서 푸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감옥 측의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푸이의 개조에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했다. 남녀문제로 처리하라며 방법까지 일러줬다. 감옥 측은 총리의 지시대로 감방에 책상을 연결해 침대를 만들었다. 푸이와 리위친의 동거를 허락했지만 허사였다.

법원은 이혼 소송을 제기한 리위친의 손을 들어줬다. 자유의 몸이 된 리위친은 방송국에 근무하는 녹음 기술자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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