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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의 바둑 산책] 배짱·안목·집중력 … 승부사 이세돌 "이기려고 두었다"

중앙일보 2014.10.02 00:41 종합 32면 지면보기
지난달 28일 중국 충칭에서 열린 10번기 8국에서 이세돌 9단이 구리 9단에게 이긴 직후 복기를 하고 있다. 눈빛이 서늘하기만 하다. [사진 한국기원]


“막상 두어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임을 알았다. 치수 고치기 10번기의 부담을 비로소 이해한다.”

58년 만의 큰 승부, 구리에 6 대 2
구리, 조언자 대동한 위험회피형
이세돌은 위험 무릅쓰는 도전형



 이세돌(31) 9단이 지난달 28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열린 ‘이세돌·구리 10번기’ 8국에서 이기며 우승을 확정한 직후 한 말이다.



 이세돌과 구리(31) 9단은 10번기 내내 승부의 중압감에 시달렸다. 한·중·일 통틀어 58년 만의 큰 승부였다. 상금의 크기와 긴장, 그리고 충격에 있어서 이만한 승부는 이제껏 없었다. <중앙일보 9월 29일자 24면>



 이번 대회 상금은 500만 위안(약 8억7000만원)으로 세계대회 3~4개를 우승한 것과 비슷하다. 세계대회 우승상금은 2억~3억원 수준이다. 긴장에 지쳐 체력은 물론 정신도 크게 소진됐다. 매달 한 판씩 9개월을 끌었다. 평소에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박은 대국자의 피를 말렸다. 구리가 1국 때에 비해 8국 때엔 새치가 매우 많아졌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다.



 패자의 충격은 상상 불허다. 과거의 10번기에서는 승패 차이가 네 판 나면 치수(置數)를 고치는 것이 관례였다. 이번엔 치수 고치기가 아니라 상금 독식이었지만 쇼크는 같다. 결과는 6 대 2. 네 판 차이니 구리의 실력은 이세돌보다 한 등급 낮다고 해도 된다. 이 점이 중국 바둑계가 받은 충격이다. 최근 구리는 중국 랭킹 2~4위를 오르내린다.



 큰 승부는 작은 승부와 차원이 다르다. 양재호(51·9단) 한국기원 사무총장도 “이 같은 큰 승부는 드물다. 승부를 가른 요인을 찾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후배 기사들은 물론 바둑계도 배워야 할 점을 찾겠다”고 했다.



 한·중 바둑의 상징과도 같은 이세돌과 구리의 승패를 가른 요인은 무엇인가. 바둑계는 그 요인으로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승부 기질과 안목, 그리고 집중력이다.



 첫째는 승부사 기질이다. 1~8국 모두 구리 옆에는 동료 등 1~3명의 조언자가 따라다녔다. 안마사도 있었다. 이것이 패인이었다. 조언은 위험회피 심리를 기른다.



 고독한 승부에서는 위험감수 심리가 절대적이다. 야성의 승부사 서봉수(61) 9단은 “승부가 클수록 배짱의 승부다. 한두 수 잘 두고 못 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결단력이 약하면 승부처에서 ‘새가슴’이 돼 착수를 결정하지 못한다. 7국 패배 후 중국 언론이 “구리의 평상심이 무너졌다”고 비판한 이유다.



 이와 관련해 최근 한국의 젊은 기사들이 우승에 도전하기보다 ‘바둑리그’ 진입 등 적당한 성적에 안주하고 있다는 지적은 유의할 만하다. 김성룡(38·9단) 국가대표팀 전력분석관은 “바둑계는 위험감수 심리인 도전의식을 길러야 한다”고 주문했다.



 둘째는 반상(盤上) 안목이다. 프로는 자신의 안목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 박승철(32) 7단은 “이 9단은 쓸데없는 고집으로 비칠 정도로 자기 입맛대로 반상을 만든다”고 했다. 이 9단이 포석에 약한 이유다. 남들처럼 두는 게 눈에 차지 않아 초반부터 지나치게 비틀기 때문이다.



 조혜연(29) 9단은 “이 9단은 불리해야 승부의욕이 살아난다. 그에게는 ‘의욕 없는 정수(正手)’보다 ‘정수 없는 의욕’이 답”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위험회피 성향 속에 들어간 구리는 의욕을 자제했다. 고비에서 마무리를 못했다.



 셋째로 체력과 정신력의 안배를 통한 집중력에서 차이가 있었다. 산소가 부족해 정신 집중이 어려운 해발 3650m 라싸(拉薩)에서의 7국에서다. 이세돌은 초반에 빨리 두어 중반 이후의 체력과 정신력 약화에 대비했다. 하지만 구리는 “한 판 한 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처럼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다. 훌륭하지만 전략으로는 부족했다. 이세돌은 상황에 따라 자세를 달리 했다.



 7국이 끝난 다음 이세돌은 “이기기 위해 두었다. 명국은 생각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상대의 실수를 기다렸다”고도 했다. 그만큼 절박감이 컸다는 뜻이다. 바둑의 목적이 100% 승리만은 아니겠지만 패배할 때의 쇼크를 절감했기에 가졌던 마음이었다.



문용직 객원기자



◆치수=대국자의 실력 차이. 1급과 3급이 두면 3급이 먼저 2점을 반상에 놓고 두기에 ‘2점 치수’라고 한다. 치수 강등은 상대보다 약하다고 공개적으로 수긍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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