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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상냥한' 종군위안부라니 …

중앙일보 2014.10.01 00:09 종합 31면 지면보기
임종철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신문에 소개된 시오노 나나미 글을 읽었다. 위안부란 말을 보면서 꽤나 ‘상냥한’ 이름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상냥함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 무슨 낱말이기에 상냥으로 번역됐나 보니 ‘やさしい’였다. 극도로 긴장한 병사가 긴장을 풀러 위안부한테 간다는 바로 뒤 문장과의 맥락을 보니 일본어 사전 『廣辭苑』에 있는 ‘정 깊은’ ‘친절한’ 중 ‘정 깊은’ 쪽이 가까울 것 같다.

 그러나 생각만 해도 인간이라면 역겨워해야 할 존재를 ‘정겨운’이라고 말하다니. 이런 말은 “무슨 짓을 해도 마을에 돌아오기만 하면 그만이다(旅の恥はかき捨て)”는 속담까지 있는 일본인만이 할 수 있는 비인간적인 말이다.

 시오노는 사전에서 위안을 찾으니 ‘노고를 위로하는 것’이고 종군위안부란 일본 사전에만 있는 말이라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세계전쟁 역사상 종군위안부를 운영한 것은 일본뿐이 아닌가.

 전장에서의 긴장을 풀려고 여자 품을 찾는다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문제는 야마도나데시고(大和撫子)라고 자랑하는 제 나라 여자를 놓아두고 하필이면 식민지와 점령지 여성들을 긴장 해소에 동원했느냐에 있다. 더 정 깊은 일본 여자를 제외한 것은 그녀들이 맞을 운명이 세계사에 찾을 수 없는 성노예임을 일본인 당사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오노는 종군위안부란 말이 없으니 영역(英譯)하면 성노예가 되겠지만 위안부와 성노예가 주는 인상은 꽤 다르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성노예는 실체를 적나라하게 밝힌 진실된 말이고, 종군위안부는 범죄를 감추기 위해 만든 거짓 이름이다.

 성노예를 부정하는 증거로, 시오노는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부녀자 수용소 이야기를 들고 있다. 전승자로 온 영국군은 수용소 경비를 계속 일본군에 맡겼다고 한다. 그녀는 여자를 성노예로만 생각하는 것이 일본 장병이라면 네덜란드 여성을 보호하는 수용소 경비를 맡기겠느냐고 했다. 주장이 여기에 이르면 다만 아연해질 뿐이다. 영국군의 눈이 있는데 감히 수용소 안 여자를 범하고자 할 바보는 천하에 없다.

 시오노는 여자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만 하다가 제한시간이 다 되어 나온 젊은 병사도 있지 않나 상상케 된다고도 말하고 있다. 제한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종군위안부를 일본군이 관리 운영했으며 그녀들이 성노예였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다.

 이제 우리는 일본어 사전에만 있는 종군위안부라는 거짓된 낱말을 전시일본군성노예로 바꾸어야 한다. 전시는 물론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 기간을 말한다. 일본군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수많은 군대 중 성노예 제도를 만든 것은 일본군뿐이었기 때문이다. 성노예라는 것은 ▶성 제공이 강제되고 ▶거처도 수용소에 한정된 사실상의 감금이어서 고대 로마제국이나 근대 미국의 노예보다도 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작부터 우리는 전시일본군성노예란 말을 쓰고 종군위안부란 일본말 직역을 버렸어야 했다. 최대 피해 국민인 우리가 전시일본군성노예란 말을 창안하지는 못했더라도 유엔을 비롯한 미국·유럽 국가에서 썼으면 그 즉시 바꿨어야 했다.

 종군위안부란 말을 쓰면 안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종군위안부란 일본말은 일본에만 있는 단어다. 당연히 청산되어야 할 일제 잔재다. 둘째, 종군이라고 하면 종군기자·종군작가 등 자발적으로 군대를 따라 이동한 사람들이 연상된다. 당연히 자발성을 함축한다. 그래서 버려야 한다. 셋째, 우리 사전에 위안부는 창녀라고 나와 있다. 창녀는 자발적으로 성을 판매하는 매매 당사자다. 따라서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돈·명예·인기를 위해 나선 직업검투사다. 그는 자유인이고 상대를 골라 경기장에 나간다. 다른 하나는 잡혀오거나 팔려온 검투사다. 그는 갇혀 지내며 검투 상대를 고를 수 없는 노예다. 전시일본군성노예는 명백히 후자다. 수용소에 갇혀 손님을 가릴 자유도 없이 줄 서 기다리는 병사를 상대로 성을 제공하는 여자를 성노예 아니면 달리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시오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돈 주고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해방노예가 될 수 있는 제도를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런 선택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당장 전시일본군성노예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 당사자인 할머니들은 노예라는 이름까지 붙이느냐고 노여워하실 것이다. 그러나 배상은커녕 사과조차 않는데 일본군이 제도적으로 성노예를 관리·운영했다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

 참고로, 시오노의 기사 바로 뒤에 도쿄대 명예교수 히라가와 스게히로의 글이 있다. 그는 도쿄의 창녀와 그 연인인 프랑스 병정을 위해 연애편지 번역을 해줬다고 한 다음 “나는 일본 위안부에게 프랑스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썼다. 연애편지까지 주고받는 일본 창녀와 비극적인 전시일본군성노예를 구분하지 못하는 게 대다수 일본인의 의식구조 같다.

임종철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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