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중·일에 민감한 말씀자료 … 2500자 생략한 박 대통령

중앙일보 2014.09.26 02:38 종합 3면 지면보기
박근혜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정상급 회의에 참석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박 대통령, 비탈리 추르킨 러시아 유엔대사,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오바마 대통령. [박종근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대통령의 말씀자료 2500자가 사라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캐나다·미국(유엔) 순방 마지막 날, 마지막 행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청와대, 보도자료 새로 배포
'한국이 중국에 경도됐다는 건 오해'
과거사 핵심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설 원고엔 있었지만 발언 안 해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마친 박 대통령은 24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에 있는 주요 연구기관 대표들과 간담회를 했다. 청와대 측은 행사 전 관례대로 기자단에 ‘대통령 말씀자료’를 미리 배포했다. 하지만 정작 박 대통령은 행사에서 이 자료대로 발언하지 않은 것이다.



 당초 배포된 ‘말씀자료’에는 민감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과거사의 핵심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있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자 보편적 인권에 관련된 사안” “북한은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핵 개발 야욕을 더욱 노골화하고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일각에서 한국이 중국에 경도되었다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한·미 동맹의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가 일부의 그런 시각을 불식시키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 관계자들은 간담회가 끝나고 3시간여가 지난 뒤 부랴부랴 기자들에게 달려와 “원고 내용을 대통령이 발언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런 뒤 당초 원고 내용을 모두 빼버린 보도자료를 새로 배포했다. “여러 도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동북아정세의 유동성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북핵 문제 등 도전과제에 대해 창의적 대응과 다원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가 다였다. 2500자 말씀자료가 100자 발언으로 뒤바뀌었다.



 대통령 연설문이나 발언록은 청와대 참모들의 꼼꼼한 검토를 거친 뒤 대통령의 최종 승인을 받아 외부에 배포되는 게 그간의 관례여서 원고 취소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행사를 앞두고 원고를 보니 너무 강한 톤이어서 발언을 취소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간담회를 취재한 기자는 비공개로 간담회가 바뀌는 바람에 박 대통령의 인사말만 들은 채 행사장을 나와야 했다.



 이렇게 된 데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박 대통령의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한국이 중국에 경도되었다는 견해는 오해”라는 표현이 자칫 중국 입장에선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게 핵심이었지 중국에 불필요한 오해를 줄 이유는 없었다는 거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대목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이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전시 성폭력을 언급하면서도 일본을 직접 지목하지 않는 우회 어법을 사용해 놓고 간담회 때 일본을 직접 언급하는 게 좋은 전략은 아니라고 판단해 위안부 대목이 빠졌다는 얘기다. “핵 개발 야욕”이라는 문구도 북한엔 자극적인 표현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청와대 외교라인 관계자는 “대통령이 당초 원고 내용대로 발언하려 했지만 참석자들이 질문을 쏟아내는 바람에 정해진 40분 동안 준비한 말을 다 못했다”며 “발언이 빠진 게 큰 의미는 아니다”고 밝혔다.



 어쨌든 순방 기자단은 소동을 겪어야 했다. 간담회 직후 귀국 비행기를 타야 해 기자들 상당수는 사전 원고를 바탕으로 기사를 미리 작성했다. 기자단은 뉴욕 JFK공항에서 보안검색 절차를 밟고 있다가 이 소식을 접하고 기사를 바꿔야 했다. 일부 석간신문은 마감시간이 임박해 더 큰 혼란을 겪었다. 한국에 남은 청와대 직원들은 온라인으로 출고된 기사 목록을 만들어 해당 언론사에 관련 기사를 빼달라고 일일이 부탁해야 했다.



 ◆박 대통령, 링거 맞고 강행군=박 대통령은 빼곡한 일정 때문에 체력이 소진돼 23일 밤(현지시간) 링거(수액주사)를 맞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하루 2∼3시간씩 쪽잠만 자는 등 강행군을 계속했다”며 “수행원들이 힘에 부칠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0일 출국해 26일 오전 귀국할 때까지 5박7일 동안 공식 일정 23개를 소화했다. 박 대통령 스스로도 출국 전 기자단에게 “일정이 너무 촘촘하다”고 걱정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 때도 피로가 겹쳐 몸살 증세를 보였다. 그 여파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면담은 취소됐었고, 한·미·일 정상회담에는 링거를 맞고서야 참석할 수 있었다. 캐나다 국빈방문과 유엔 총회 및 기후정상회의 일정을 마친 박 대통령은 26일 오전 귀국했다.



뉴욕=신용호 기자, 허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