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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호주제·영화검열 … 2만5786건, 국민 삶을 바꾼 26년

중앙일보 2014.09.26 02:08 종합 16면 지면보기
헌법재판소가 세계헌법재판회의 3차 총회를 28일부터 4일간 서울에서 개최한다. 민주주의·법치주의·인권을 주제로 세계의 헌법재판관(대법관)들이 모이는 것이다. 정식 회의체로 출범한 이후 처음 열리는 실질적인 창립대회로 그 의미가 깊다는 평가다. 이를 계기로 한국 헌법재판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3회에 걸쳐 짚어봤다.


헌법재판소 변화의 길을 묻다 <상>
권위주의 청산 마무리 단계
새로운 위상·역할 찾을 필요
‘50대·남성·판사’ 프레임 여전
대법원과 갈등도 쉽지않은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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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22일. 헌법재판소는 “자녀는 아버지의 성(姓)을 따른다”는 민법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다. 헌재는 “일방적으로 아버지의 성을 사용할 것을 강제하고 어머니의 성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이 결정 전까지 재혼 가정에서 자녀의 호적정정신청을 하더라도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앞서 같은 해 2월엔 호주제에 대해서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왔다. “호주제는 정당한 이유 없이 남녀를 차별하는 제도”라며 “오늘날 가족관계는 가족구성원 모두가 인격을 가진 개인으로 평등하게 존중되는 민주적 관계로 변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만5786건. 헌법재판소가 1988년 창설된 뒤 26년간 처리한 사건 수다. 대통령 탄핵사건 기각처럼 정치사의 획을 그은 결정, 호주제 헌법불합치처럼 전 국민의 삶을 바꾼 결정도 있었다. 헌재의 등장으로 법전에서나 볼 수 있던 헌법적 이상이 현실 속에서 실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87년 9차 개헌 후 탄생했을 때만 해도 헌재가 사법기관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88년 9월 헌재가 입주한 첫 사무실은 서울 정동 정동빌딩 16층에 있었다. 72년 만들어졌지만 단 한 건의 헌법재판도 하지 않아 ‘양로원’으로 불리던 옛 헌법위원회가 쓰던 사무실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첫해는 단 한 건의 결정도 없이 지나갔다.



 1~5기 재판부를 거치며 헌재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96년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규정한 영화법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지면서 검열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성동본 금혼(禁婚)에 대한 위헌 결정(97년)은 단지 성이 같다는 이유로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던 수많은 커플을 구제했다. 인터넷 실명제 위헌(2012년), 군 가산점 위헌(1999년), 공무원 시험 나이제한 헌법불합치(2008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선거운동 금지 한정 위헌(2011년) 모두 한국 사회에 뜨거운 논쟁을 일으킨 결정이다. 그 결과 중앙일보가 2005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파워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헌재가 공공기관 중 1위를 고수할 정도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창설 26년을 맞은 헌재 앞에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 놓여 있다. 우선 권위주의 시절 만들어진 악법(惡法)들이 대거 정리되면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전임 재판부에서 ‘합헌’ 결정을 했던 법률이 얼마 후 후임 재판부에서 ‘위헌’으로 뒤집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동일한 헌법적 사안들이 거듭해서 헌법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이에 따른 사회적 불안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과의 갈등도 풀어야 할 문제다. 법원 재판을 헌법재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느냐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양창수 전 대법관은 지난 5일 퇴임식에서 “(두 기관의 갈등이)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했다.



 ‘50대, 판사, 남성’이란 키워드로 요약되는 재판관 구성을 어떻게 다양화할지도 숙제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가 지나치게 형식적인 법논리를 적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다양한 배경의 재판관을 임명함으로써 헌재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영선·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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