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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5) 교직생활 42년 심옥령 청라달튼외국인학교 교장

중앙일보 2014.09.24 05:55 강남통신 6면 지면보기
심옥령(62) 청라달튼외국인학교 초등학교장은 42년째 교직생활을 하고 있다. 한 분야를 40년 넘게 지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의 이력은 사실 조금 더 특이하다.


전국 체전 같았던 70년대 초등교육 … “대통령기 쟁탈전도 있었죠”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외국인학교까지 두루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또래들 머릿속에 각인된 한국의 산업화·민주화·세계화 시대에 대한 기억보다 주입식 교육의 몰락과 영어몰입교육의 시작, 외국인학교 열기가 시대별로 먼저 떠오른다. 심 교장이 겪은 학교 현장의 변화, 거기에 우리 공교육의 지나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초등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사실 심 교장이 교직에 몸 담은 계기는 지금 돌이켜봐도 전혀 유쾌하지 않다.



“고3 때인 1968년 대학 시험에 떨어졌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전국 고3이 동시에 수능을 치르는 게 아니라, 먼저 예비고사를 치른 뒤 합격생만 대학별 본고사를 보는 시스템이었어요. 이화여대 신방과에 지원했다 낙방해 예비고사 점수만으로 갈 수 있는 강릉교대를 택했죠.”



심 교장은 명문 강릉여고 출신이다. 수재가 즐비한 틈에서도 늘 수석을 다투던 터라 이화여대에 떨어지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심 교장은 “너무 충격을 받아 석 달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며 “돌이켜보면 교사라는 천직을 찾아가기 위한 운명이었나 보다”고 했다.



강릉교대는 1978년 졸업생 배출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심 교장은 이 학교 1기인 69학번이다.



“당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사가 부족해 전국적으로 2년제 교대가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절이에요. 그런데 또 이번엔 졸업생이 쏟아지며 교사 발령 대기자가 늘어나니 10년도 안 돼 학교 문을 닫은 거죠.”



여자 교사 드물던 시절



전국 어느 국민학교나 매한가지로 72년 심 교장이 처음 부임한 강릉국민학교(이하 강릉초)에도 학생이 넘쳐났다. “한 학년에 보통 8개 반, 한 반 학생 50~60명은 기본이죠.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 2부제 수업을 하는 곳도 많았고요. 강릉초는 2부제는 안했지만요.”



지금 초등학교에선 여초(女超)현상이 두드러져 남자 교사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지만 당시엔 남자 교사가 훨씬 많았다. 한 학년 8개 반 가운데 여자 담임은 많아야 2명을 넘지 않았다. 특히 고학년은 남자 교사에게만 맡겼다. 이렇게 많은 학생을 한데 모아 가르쳐야 하니 당연히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될 수밖에 없었다.



콩나물교실(1975년)
“아이들 조용히 시키고 똑바로 앉혀서 칠판만 쳐다보게 하는 게 이상적 교사의 역할이었어요. 아이들이 꼼짝 못하는 선생님일수록 실력 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니까요. 체벌도 많았죠.”



당시에는 도 단위, 전국 단위 경시대회가 많았다. 심 교장도 강릉초에 부임하자마자 ‘자유교양경시대회’의 준비를 맡았다. 초4~5학년이 문교부(현 교육부) 지정 도서를 읽고 문제를 푸는 대회로, 한 학교에서 학년별로 대표 학생 5명을 선발해 지역 예선을 거쳐 전국 대회를 한다. 입상자 많은 시·도에는 대통령 기(旗)를 주는데, 매년 가장 입상자를 많이 낸 지역이 대통령기를 빼앗아 오는 쟁탈전 형식이라 개별 학교는 물론 시·도가 자존심 대결을 펼쳤다. “신입 교사가 이런 큰 대회 준비를 맡았으니 얼마나 부담이 됐겠어요. 지금이야 학생 개개인이 경시대회 준비를 학원에서 한다지만 그땐 다들 교사만 바라봤죠.”



다행히 지역 예선을 통과해 전국 대회 입상을 해 청와대 견학까지 갔다.



교사 3년차 때엔 ‘강원도내 국민학교 6학년 학력고사’에 응시생을 전담하기도 했다. 학교별 대표를 뽑아 시험 보고 순위 매기는 대회였다. “원래 중학교 입시를 보다가 69년에 서울을 시작으로 중학교 진학 시험을 폐지했잖아요. 시험을 없애니 학력 저하를 우려한 거죠. 그래서 그해부터 전국 6학년 학력고사가 생겼어요.”



강원도에서는 이 점수를 높이기 위해 도 단위 대회를 만든 거다. 다행히 이때도 결과가 좋았다. “우리 학교에서 10명이 출전했는데 8명이 10등 안에 들었어요.” 신임 교사 시절 연이은 성과 덕에 문교부 장관상을 받았다.



(왼쪽부터) 1 심 교장이 영훈초 재직 당시 독서 장려 차원에서 만든 메달. 1년에 100권 읽은 아이에게는 금메달, 50권은 은메달, 30권은 동메달을 줬다. 2 2003년 종업식 날 담임을 맡았던 반의 학부모들이 손수 만든 카드를 책으로 엮어 선물해줬다. 3 영훈초 1990년 졸업앨범.




교육경영자, 영훈초를 흔들다



강원도에서의 교사 생활은 6년 만에 마무리됐다. “78년 롯데그룹 다니던 남편과 결혼하고 서울 왔어요. 강원도 사람이 서울 오면 거의 동대문구 전농동, 이문동 근처에 살았거든요. 우리 부부도 그쪽 동네에 자리잡았죠.”



아이 낳고 1년은 살림만 했다. 79년 2월 어느 날 영훈국민학교(이하 영훈초)에서 전화가 왔다. “영훈초 교감의 지인이 교사던 우리 고모님과 아는 사이였나 봐요. ‘이력서 한번 갖고 오라’고 연락한 거죠.”



영훈초는 그가 강원도에서 겪은 학교와는 많이 달랐다. “면접을 마치고 교장 선생님이랑 학교를 한바퀴 도는데 학교가 크고 시설도 정말 좋은 거예요. ‘여기서 잘 해내고 싶다’는 승부욕이 마음 속에서 불끈 솟더라고요.”



지금이야 명문 사립학교로 명성이 높지만 당시 영훈초는 경복·리라·은석·계성·경기초에 비해 인기가 덜 했다. “리라·계성·경기초 학부모 중엔 정재계 고위 인사가 쫙 포진해 있었지만 영훈초엔 교수 자녀가 많았어요. 국민대 등이 있는 정릉과 가까워서 그랬나 싶어요. 어쨌거나 대단한 학교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84년 설립자 김영훈 이사장의 며느리인 박성방 교장이 부임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파인데 교육자라기보다는 교육경영자였어요. 박 선생님이 오신 뒤부터 영훈초 교실은 실험실이라도 된 듯 매일 새로운 교수법을 적용했어요.”



(왼쪽부터) 4 1980~90년대엔 직접 촬영한 필름 슬라이드를 수업 참고 자료로 활용했다. 5 현재 근무 중인 청라달튼 외국인학교 졸업앨범.


부정당한 주입식 교육?



그렇게 해서 나온 첫 번째 변신은 ‘열린 교육’이었다. 박 교장은 심 교장을 포함해 교사 6명을 골라 1학년을 맡긴 뒤 주입식 수업 대신 학생과 소통하라고 주문했다. “교실을 한 칸 반씩 쓰게 했어요. 반 정원은 45명에서 20명으로 줄였고요. 교실에 들어가면 너무 휑하다 싶을 정도였죠.” 문제는 열린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이 없다는 거였다.



“박성방 선생님이랑 다른 교사, 학부모까지 불러놓고 거의 매주 공개 수업을 했어요. 내가 봤을 땐 만점짜리 수업이었어요. 애들이 모든 질문에 손 번쩍 들어 발표 또박또박 하고. 다른 반보다 한 시간 먼저 등교해서 연습했으니 완벽하게 해낸 거죠.”



하지만 박 교장은 “이건 연극이지, 수업이 아니다”며 불만스러워했다. “소위 ‘멘붕’에 빠졌어요. 내가 아는 수업은 이게 전부인데 갑자기 그 모든 걸 부인 당한 거 같았어요.”



심 교장뿐 아니라 교사 대다수가 ‘열린 교육’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영훈초는 전국 경시대회란 경시대회는 전부 싹쓸이했어요. 다른 사립초가 귀족학교를 표방했다면 영훈초는 처음부터 엘리트학교를 지향했어요. 수학·과학 경시대회 1등은 당연하고, 1~10등까지 영훈초로 줄을 세워야 속이 시원한 그런 교사들이 다니던 학교였어요.”그러니 교내 시험도 잦았다. 매달 전 과목 시험을 보고 교무실 벽에 반별 평균과 순위를 그래프로 그려 죽 붙여놨다. 교사 간 경쟁이 심했지만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그러니 박 교장의 “다 바꾸라”는 요구를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거다.



심 교장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엔 학생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줬다.
열린 교육 지침 1년 만에 영훈초의 부장급 교사 6명이 사표 쓰고 나갔다. “다들 자존심에 용납이 안됐던 거죠. 스파르타 식으로 수업해서 아이들 점수 쭉 끌어올리는 게 교육이고 교사 실력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들 눈높이에 수업을 맞추는 열린 교육이 대체 왜 필요하냐는 생각이었어요.”



남은 1학년 교사들은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책걸상을 다 밀쳐놓고 바닥에서 아이들과 뒹굴면서 가르쳐도 보고, 학생 한명 한명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수업을 하면서도 계속 안갯속을 헤매는 느낌이었어요.”



영훈초에선 좌충우돌이라고만 생각했지만 한국 교육학계에서는 그 시도에 의미를 두고 연구를 시작했다. “박성방 선생님이 진짜 사업가인 게, 교육학 교수가 참관 요청을 하면 다 허락했어요. 그 교수들이 우리 수업을 관찰한 후 논문 써서 학계에 보고하고, 새 교수법을 고안해 제안하기도 했어요. 우리끼리 헤매는 것보다 훨씬 쉽게 해결이 된 셈이죠.”



영어몰입교육의 시작



영훈초는 91년 국내 최초로 영어 몰입교육을 시작했다. 심 교장은 “박성방 선생님이 일본 후지산 밑에 있는 사립 가또초등학교가 영어몰입교육 하는 걸 보고 벤치마킹한 것”이라 설명했다.



1학년은 6개 반인데 이중 4개는 일반반, 2개는 영어 몰입반으로 모집했다. 영어몰입반엔 원어민 교사 1명과 한국인 교사 1명이 팀티칭을 하게 했다. “2년이 지나니까 영어 몰입반으로만 몰리더라고요. 아예 일반반을 없애고 영어몰입반으로 채웠죠.”



때마침 해외여행자유화(89년)와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바람에 영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았다. 90년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대우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였다. 영훈초의 영어몰입교육이 자녀를 세계인으로 키우고픈 학부모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정작 심 교장은 처음엔 초등 영어 교육에 반감을 가졌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보이는 거예요. 영어를 배우면서 아이들 사고 방식이 엄청나게 유연해졌어요. 지금도 영훈초 졸업생이 다른 아이들보다 영어 실력이 더 뛰어날 거란 기대는 안 해요. 대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서양식 사고방식을 초등 시절 체화한 게 가장 큰 소득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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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의 추억



사립학교라 대기업 오너 자제만 다닐 것 같지만 형편 어려운 학생도 적지 않다. 그래서 학기 초엔 담임 교사에게 학부모가 가정방문을 꼭 하게 했다. “제각각인 학생 형편을 교사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지만 80~90년대까지만 해도 가정방문 온 교사에게 학부모가 촌지 쥐어주는 게 관행이었다. 심 교장은 “교사로서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내가 집집마다 구걸하러 다니는 거지인가, 나도 월급 받는데 왜 촌지를 받아야 하나 매일 고민했다.”



하지만 대다수 교사가 촌지를 받는 상황에서 혼자 거부하기도 쉽지 않았다. 선배 교사들이 “심 선생만 안 받으면 교무실 분위기가 이상해진다”며 타박 아닌 타박을 했고, 촌지 내밀다 거절당한 학부모는 “액수가 적어서 안 받았다”는 헛소문을 내기도 했다.



심 교장은 스스로 교사 경력이 딱 10년째 되는 해인 82년을 촌지 거부를 위한 디 데이(D-Day)로 정했다. 그리고 모든 촌지를 거절했다. “홀가분하고 뿌듯했죠. 아이들 보기도 떳떳하고요.”



영훈초가 인기를 얻으면서 삼성이나 롯데·SK·신세계 등 대기업 오너 자녀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심 교장은 “아이들 사립학교 보내는 부자들 욕하는 분위기가 너무 안타까워요. 특히 재벌일수록 어린 시절 한국에서 교육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부모가 재벌이지 애들은 그냥 보통 학생이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보호받기는커녕 오히려 역차별로 피해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플 때가 많았죠.”



심 교장은 현재 인천에 있는 청라달튼외국인학교 초등학교 교장이다. “이곳에 와보니 미처 못봤던 한국 교육이 보인다”고 했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른 인성을 갖춘 인간’을 길러내는 거잖아요. 외국 학부모는 이걸 알고 실천해요. 한국 부모와 교사는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은 못하는 거 같아요. 인성은 외면하고 지적인 부분만 강조하잖아요. 인성과 지성으로 고루 무장한 인재가 무너지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길러내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직생활 4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숙제가 남았네요.”





글=박형수·정현진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자, 퍼즐 맞추기를 한번 시작해볼까요.



서로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 보통 사람들의 개별 인생을 이어붙여 한국 현대사를 총정리하는 ‘당신의 역사’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따로 떼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다 맞추고 나면 원래의 큰 그림이 보이는 직소 퍼즐처럼 말이죠. 호텔업계와 영화계·교육계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인생을 퍼즐 맞추듯 재밌게 한번 이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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