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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독설 약해졌다고? 내 소설은 원래 따뜻하다

중앙일보 2014.09.22 19:40
올해 황순원문학상의 주인공인 소설가 은희경(55)씨. 그에게 2014년은 한층 각별하다. 1995년 중편 ‘이중주’로 등단했으니 작가가 된 지 20년째가 되는 해다. 그런 해에 ‘최고의 단편소설’에 주어지는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수상작 ‘금성녀’는 그가 올초 출간한 열두 번째 소설책 『다른 모든 눈송이와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에 실린 작품. 출간·수상·20년, 세 겹의 경사다.


황순원문학상 소설가 은희경

그런 은씨의 작품 세계를 한두 줄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복고풍 성장소설 『새의 선물』, 찌질한 유신세대의 자화상 격인 『마이너리그』 등 초창기의 그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코드에 예민했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통속과 ‘문학적인 것’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대중물. 2012년 작 장편 『태연한 인생』은 은씨 스스로도 그 일부인 한국문단의 지리멸렬함을 그야말로 태연하게 까발렸다.



은씨의 다채로움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대라면 역시 냉소와 독설이다. 그의 소설은 아프면서도 시원한 통증 같다. 하지만 신랄함 만으로 충분한 걸까. 그의 소설의 감동과 재미는 어디서 오는 걸까.



그 비밀은 e메일과 국제전화로 들어야 했다. 그는 지난달부터 미국 아이오와 국제 창작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다음달 하순까지다.



-소감은.



“이곳 시간으로 새벽에 수상소식 전해 듣고 너무 좋아했더니 전화한 사람이 핀잔 주더라. 새 작품을 발표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문학상은 일종의 추인(追認), 격려 아닌가. 더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순원 선생님의 단편은 지금 읽어도 군더더기가 없다. 그 분의 이름으로 된 상이라 더 뜻깊다.”



은씨는 “아이오와의 외국 작가들에게도 물론 수상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한데 5000만원인 상금을 500만 달러(약 52억 원)로 잘못 말했다. 5만 달러로 정정했지만 짓궂은 외국작가들, 계속해서 ‘500만 달러의 작가’라며 놀린단다.



-소설책 끝 ‘작가의 말’에 가끔 등장하는 K는 남편이라고 들었다. 어떤 축하를 받았나.



“나는 멘탈이 약하다. 자신감도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남편의 격려가 큰 힘이 된다. 남편은 졸업 후 기자 일을 했지만 대학 때 소설을 꽤 잘 썼다. 그가 구상이나 초고 단계 때 ‘말 된다’고 평해주는 게 가장 큰 칭찬이다. 듣기 좋은 소리로 ‘상 받을 줄 알았다’고 하더라.”

-소설 소재가 무척 다양하다. 어떻게 글감을 구하나.



“쓸 게 없어서 걱정인 적은 별로 없다. 옛날에 한 얘기 왜 또 하냐는 얘기 들을까봐 두렵다. 살면서 어떤 일이 벌어져 기쁨이나 상처로 남으면 그게 머릿속에서 하나의 질문,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결국 인물에는 나 자신의 문제의식이 투영될 수 밖에 없다. 나이·성별이 다를지라도 소설 속 인물은 결국 나다.”



-이번 당선작에도 자전적 요소가 있나.



“어느 정도 그렇다. 엄마에게서 소재를 얻었다. 소설 주인공 마리가 연상의 애인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실제로 우리 아버지가 엄마에게 보낸 옛날 편지를 갖다 썼다. 완규와 현, 두 젊은이는 내 아들 얘기를 조금씩 집어넣은 거다. 집안에 소설가가 하나 있으면 3대가 털린다고 한다. 내 경우가 그렇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분방한 연애소설인데.

“그런 작품을 쓸 때는 친구나 주변에서 들은 얘기를 과장해서 쓰곤 했다. 하지만 역시나 자기 얘기 쓰는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때 깨달았다. 그런 얘기를 쓸 때는 더 세게 써야겠다고. 그래야 설마 은희경이 그런 짓은 안 하겠지 할 거 아닌가.”

수상작 ‘금성녀’는 일흔 셋의 할머니 마리가 갑작스럽게 자살한 친언니 유리의 고향땅 장례식에 참가하다 오빠와 언니의 손자인 완규·현과 조우(遭遇)하는 줄거리다. 노욕(老慾) 없이 초연하면서도 기품 있는 마리의 성정이 생전 유리 언니의 정 반대 성격과 대비되는 가운데 희미한 옛 인연의 끈을 타고 할머니 세대와 손주 세대간에 미세한 유대가 흐른다. 작품이 수록된 소설집 제목 ‘다른 모든 눈송이와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가 시사하듯 요즘 은씨의 관심사인, 존중받아야 마땅한 개인성의 독자성에 관한 얘기다.



은씨는 “지난해 어머니의 팔순 친구가 자살했다. 삶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낯선 사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단순한 생각이 소설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또 “스침과 흘러감, 그 시간의 불연속선에서 스러져가는 삶의 플롯, 삶의 작은 위로가 되는 오래전 사소한 인연 같은 것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특유의 냉소와 독설은 덜한 것 같다.

“내 소설의 냉소와 독설은 객관적이기 위한 것이지 비관주의 때문은 아니다. 나는 내 소설이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으면 소설을 쓸 수 없다.”



-앞으로 작품 계획은.



“나는 꼭 쓰고 싶은 이야기도, 내 작업이 어디로 도달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열심히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얘기들이 생겨난다.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됐다가 사라져버린 이야기도 있고, 옮겨 쓰는 동안 뜻하지 않게 낯선 문장을 만나 완전히 바뀌어버린 얘기도 있다. 그러니 뭔가 작가적 야망이나 글쓰기의 신념이 있었다면 틀림 없이 좌절했을 것이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곤 하기 때문에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단편 한두 편으로 쓸 생각이다. 그걸 끝낸 다음에는 내 여대 기숙사 시절을 소재로 한 장편을 쓰고 싶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이라면.



“지금 익숙한 삶의 기반으로부터 떨어져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이럴 때 내가 그동안 규정하고 있던 내 모습과는 다른 내가 튀어 나온다. 나는 어쩌면 소심해서 많은 것을 피하며 살아 왔다. 등산은 즐겨 하지만 그보다 위험해 보이는 스킨스쿠버는 하지 않는다. 뭔가 안전한 모험을 하며 사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여기 아이오와에서는 한국에서 살 때보다 더 적극적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먼저 다가가 외국 작가에게 말 걸어야 한다. 그런 경험을 기대하고 여기 온 것이기는 하다. 그런 생각들을 소설로 다루고 싶다.”



-상금은 어떻게….



“한국에서 글만 써서 먹고 살기 어렵다. 생활의 규모를 줄여 사는 편이다. 생활인으로 보내야 할 시간을 작가로 보낼 수 있게 됐으니 상금으로 시간을 산 셈이다. 그래도 어머니와 아이들, 3대가 떠들썩한 여행 한 번 하고 싶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은희경=1959년 전북 고창 출생.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장편 『소년을 위로해줘』 등. 이상문학상·동인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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