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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한국 정치의 마비, 속수무책인가

중앙일보 2014.09.22 00:14 종합 39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지난 5개월간 한국의회민주주의는 마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른바 87년체제의 효용성이 점차 한계에 달하고 있다는 우려가 짙어지더니 급기야는 세월호 참사의 여파가 한국 정치를 민주정치 파탄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전국을 휩쓴 민주화의 흥분 속에 출범한 87년체제가 어찌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빛과 효능을 잃어가게 되었는지 냉정히 되짚어보아야 할 시점이다. 특히 이처럼 심각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이나 치유책을 모색하는 적극적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실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독재정권이나 권위주의체제를 붕괴시킨 민주화의 성공이 자동적으로 민주정치제도의 정착과 안정적 운영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정치발전론에선 상식화된 지 오래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꽃피던 아랍의 봄이 얼마나 허망하게 끝난 짧은 꿈이었는지 지켜보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정치 참여와 언론자유가 보장되고, 공정선거가 상식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군의 정치개입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사라진 한국의 민주화는 일단 성공사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87년 한국 민주화의 성공은 국민의 자유로운 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 법과 제도에 따라 국가를 운영한다는 외형적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진 데 비해 ‘다수에 의한 통치, 소수의 권리보장’이란 대의민주주의의 원칙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시민정치문화를 담보하는 데는 지극히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의회가 중심이 되는 대의민주주의의 운영은 장황한 토론과 수많은 타협 및 절충의 긴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기에 이를 감내하는 국민의 인내심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능률과 속도에 치중하는, 특히 양단간에 확실한 결판을 선호하는 한국적 정치문화에서는 의회민주주의의 번거로운 절차가 비능률적이며 비생산적이란 비판적 시각에 부딪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강력한 지도자의 쾌도난마식 국사 처리에 대한 기대, 경우에 따라서는 독재에 대한 향수마저도 고조될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론 의회정치의 지루한 절차에 얽매이기보다는 거리로 나서 물리적 행동으로 정치의 향방을 결정짓겠다는 충동이 습관화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렇듯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다수에 의한 통치와 소수의 권리보장’에 대한 국민적 확신이 미숙한 상황에서 87년체제가 비교적 무난하게 처음 15년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 한국 정치를 이끌었던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네 지도자가 다수와 소수의 관계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회고된다.

이들은 예외 없이 본인이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집권을 위해서는, 더 나아가 집권 후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타협과 연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정치의 기본원칙을 확실히 이해한 현실주의 정치인들이었기에 민주화시대 초기의 안정을 담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대선 이후부터 한국 정치에서는 안정보다 불안정의 역학이 점차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을 흔드는 병리적 현상이 짙어지게 되었다. 국민이 직선으로 선출한 대통령이나 국회, 특히 ‘다수에 의한 통치’란 원칙을 가볍게 무시하는 풍조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로 나타난 약세를 강한 소신과 조직력으로 메울 수 있다는 위험한 발상이 거침없이 유행해왔다. 그 결과로 다수당이면서도 자신감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소수당은 오히려 전 국민을 대표라도 하는 양 환상에 젖어드는 민주정치의 기형화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

  결국 오늘의 한국 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헌법적 차원에서의 위기이지 단순한 시행착오의 결과라 할 수는 없다. 87년체제도 간단한 리모델링보다는 재건축 수준의 큰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본격적인 구조조정 논의는 아무도 시작하지 않은 채 머뭇거리기만 하는가. 그간의 개헌 논의가 제대로 전개되지 못한 것은 역대 청와대와 야당의 우유부단 때문이었다. 청와대는 정치 논의의 중심이 여의도로 가는 것을 원치 않는 동시에 40년 전에 시도되었던 ‘정치의 비정치화와 행정의 정치화’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을 수 있다.

한편 야당의 입장에선 개헌을 포함한 민주정치의 구조조정 논의는 여야와 각계의 입장을 조정하는 폭넓은 협의가 필수인데 이를 위해 투쟁 제일주의를 접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한국 정치의 향방을 좌우하는 역사적 선택에 청와대와 야당의 슬기로운 결단을 국민과 함께 기다려 본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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