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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워싱턴에 일본이 돌아왔다

중앙일보 2014.09.19 00:44 종합 36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는 일본의 로비가 맹렬하다. 하나 결코 쉽진 않을 거다. 위안부 문제는 이제 한·일 간 이슈에서 벗어났다. 인류의 보편적 인권을 침해한 사건으로 격상된 것이다. 미국 워싱턴 정가에 이어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인권위원회에서도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졌다는 게 그 증거다. 일본의 로비가 어느 때보다 뜨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 정계에 정통한 한 인사는 “매달 세 명꼴로 일본의 핵심 인사들이 워싱턴을 방문한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6일 워싱턴 정가의 관심을 끈 장문의 기사가 미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브루킹스연구소,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등 미국의 내로라 하는 싱크탱크들 이야기였다. 지난 4년간 이들이 외국 정부로부터 최소 2400만 달러를 받고 고객들의 입맛에 맞는 연구 결과를 냈다는 폭로였다. NYT는 나아가 문제의 연구소들이 고객들을 위해 미국 백악관, 국무부 인사와의 만남까지 주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기사에 붙은 참고 자료였다. 브루킹스연구소의 국가별 수수 내역으로, 각국이 워싱턴 정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뛰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브루킹스는 일본 대사관과 항공자위대로부터 31만 달러를 받았다. 한국은 외교부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26만 달러를 지원했다.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의 4.5배인 걸 감안하면 의외로 높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한국의 손이 커지면서 영향력도 급신장했을 걸로 판단하면 큰 오산이다. 일본의 진짜 실력은 다른 데 있는 까닭이다. 일본 정부는 1970~80년대부터 거물 로비스트를 고용, 미 정계를 주물러 왔다. 워싱턴 사정에 밝은 이들은 올 들어 일본이 백악관·의회, 그리고 국무부를 상대로 어느 때보다 맹렬히 로비를 펴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아베 신조 총리의 언행을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2007년 미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될 때 일본 총리가 바로 아베였다. 게다가 미 정계는 위안부 결의안 처리 시점을 일부러 아베 방미에 맞췄다. 따끔하게 경고하겠다는 의도였다. 대미 관계에 목을 매는 아베로서는 위안부 결의안이 잊지 못할 치욕이자 목에 걸린 가시 같을 거다. 그가 두 번째로 총리에 오른 이후 워싱턴을 처음 방문했을 때 뱉은 말이 “일본이 돌아왔다(Japan is back)”였다.



 미국은 ‘외국 로비스트 등록법(FARA)’을 제정, 외국 정부를 위해 뛰는 로비 회사들의 자세한 활동과 커미션 등을 공개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 일본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는 로비 회사는 모두 41개. 한국은 24개에 불과하다. 숫자도 숫자지만 커미션 규모와 활동 내용에서도 상대가 안 된다.



 예컨대 미 버지니아주가 그간 일본해라고 썼으나 동해라는 이름도 함께 쓰겠다고 하자 일본 대사관은 이를 막기 위해 맥과이어우드란 로비회사에 2만5000달러를 지불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더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일본 정부는 자신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호건 로벨스, 헥트 스펜서 두 로비업체에 각각 52만3000달러, 19만5000달러를 줬다. 두 회사는 위안부 결의안에 앞장선 미 의원들과 한국 교민단체들의 동정을 조사해 일본 측에 보고한 걸로 돼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빙산의 일각이다. 워싱턴 내 일본의 진짜 저력은 국가정책을 발벗고 지원해주는 일본 기업에서 나온다. 상징적인 케이스가 워싱턴 벚꽃축제다. 1912년 도쿄 시장이 기증했다는 벚꽃을 보기 위해 워싱턴에 관광객들이 몰려오는데, 이를 계기로 각종 일본 관련 행사가 열린다. 이 축제 비용을 일본 기업들이 모두 댄다.



 버지니아주 동해 병기 파동 때에는 주미 일본대사가 이런 편지를 보낸다. “철회하지 않으면 버지니아주에 투자했던 일본 기업 모두가 철수할 수 있다”는 협박성 경고였다. 일본 기업들이 정부를 전폭적으로 밀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얘기다.



 위안부 문제에도 일본 기업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미국 내 한인단체들은 위안부 소녀상 재판과 관련, 철거를 요구하는 일본계 주민들이 그렇게 빨리 소송비용을 마련한 것은 일본 기업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한국 업체는 어떤가. 삼성·현대차·LG 같은 대기업이라면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가꾸면서 공공외교의 한 축을 짊어지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도 제대로 도와주기는커녕 한국 회사란 정체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해외에서 열리는 행사를 지원해주면서도 혹시 책잡힐까 “회사 이름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다반사다.



 이런 풍토라 “워싱턴 싱크탱크에 대한 한국의 재정적 지원은 정부·공공재단 및 기업까지 모두 나서는 일본에 비하면 100분의 1에 불과하다”는 한탄까지 나온다. 국가 브랜드는 그 나라에서 생산된 상품 이미지와 직결된다. 길게 보면 국가 브랜드를 개선하고 나라의 국격을 높이는 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확실한 길이다. 산처럼 쌓인 사내 유보금의 투자처를 못 찾겠다는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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