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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김동진과 이범균, 누가 지록위마 했나

중앙일보 2014.09.19 00:41 종합 38면 지면보기
조강수
사회부문 차장
지난해 5월 서울 국기원에서 서울시 태권도 대표 선발(고등부) 결승전 3라운드가 진행됐다. 5대 1로 상대 선수를 이기고 있던 전모(17)군에게 주심이 경기 종료 50초를 남기고 경고 7개를 연달아 줬다. 전군은 경고 누적으로 반칙패했다. 태권도 관장인 전군의 아버지가 항의했지만 묵살됐다. 보름 뒤 억울함을 참지 못한 아버지는 목숨을 끊었다. 1년4개월 만인 지난 15일 경찰 수사 결과가 나왔다. 요지는 “당시 상대 선수를 태권도 특기생으로 진학시키기 위한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거였다. 심판의 편파 판정이 없었다면 애꿎은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심판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



 하물며 인간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형사 재판의 주심 재판관은 어떨까.



 지난 11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1심 재판에서 ‘공직선거법 무죄, 국정원법 유죄’ 판결이 선고됐다. 원 전 원장의 지시로 국정원 직원들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인터넷 댓글을 단 행위는 정치 개입이 맞지만, 선거 개입으로까지 볼 수 있는지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대형 사건의 결말 치고는 속 시원한 건 아니었다. 고심 끝에 절충점을 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친분 있는 판사를 사석에서 만나면 국민적 관심이 가는 판결을 화제로 올려 잘했네, 못했네 품평을 하곤 한다. 하지만 공개적 비판은 여간해선 안 한다. 일종의 ‘금도(襟度)’다. 판사들 사이에선 ‘(사건) 기록을 보지 않았다면 다른 판사의 판결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존재한다. 현재 진행형인 사건에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된다. 방대한 수사기록과 증거, 장기간에 걸친 피고인·증인의 법정 진술과 주장, 말투·어투·표정 등의 종합 결정판이 판결이므로 기록을 보지 않은 판사는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의미다. 재판 전문가인 판사들이 어설피 판결문만 훑어보고 너도 나도 공개적 의견을 표명하기 시작한다면 사법부는 대혼란에 빠진다. 이를 막기 위한 영리한 기제인 셈이다.



 그러나 법원 내 불문율은 김동진(45·사법연수원 25기)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가 12일 법원 인트라넷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깨졌다. 이 글의 내용은 거침이 없다. 하지만 두 가지 면에서 금도를 넘었다. 현직 판사가 확정이 되지 않은 다른 재판부(서울중앙지검 형사21부 이범균 부장판사)의 사건에 대해 선입견이 담긴 격문을 썼다는 점이다. 1심 재판장을 겨냥해 “입신영달(立身榮達)에 중점을 둔 ‘사심(私心)’ 판결”이라고 한 인신모독성 표현보다 더 심각한 건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선거개입이라고 보는 게 옳다”는 판단 부분이다. 증거 관계는 차치한 채 결론을 정해 놓고 재판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 김 부장판사는 1심 판결을 ‘지록위마(指鹿爲馬)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중국 진시황의 아들 호해에게 환관 조고가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주장한 일화에 빗대서다. 하지만 스스로가 지록위마의 우를 범한 건 아닌지 사색부터 하는 게 옳은 자세일 듯싶다.



조강수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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