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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생님은 족집게가 아니야, 생각하는 법을 길러주지

중앙일보 2014.09.17 00:12 Week& 3면 지면보기
김태현 교사의 문학 수업 시간엔 자석 붙은 흰색 보드를 활용한다. 모둠별로 보드를 나눠주고 토의 내용을 적게 한 뒤 이를 칠판에 전부 붙여 비교한다. 김 교사는 이 중 특이한 내용이 눈에 띄면 발표를 시키거나 전체 토론에 부치기도 한다. [김경록 기자]


3교시 체육, 4교시 국어(문학). 시간표만 보면 “4교시 수업 망쳤네”라고 생각하기 쉽다. 운동장에서 뛰다 들어와 가뜩이나 배고프고 피곤한데, 교과서에 머리 콕 박고 교사 설명 들어야 하는 국어 시간이라니. 게다가 배울 내용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상의 시 ‘거울’이다. 한 반에 절반이라도 안 자고 깨어있으면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사립 일반고인 경기도 안양시 백영고의 김태현 국어교사는 “내 수업에 자기는커녕 깜빡 조는 아이도 없다”며 자신만만하게 교실 문을 열어줬다.

[수업의 신] 안양 백영고 김태현 국어교사



김 교사 말대로였다. 수업 시간 내내 하품하는 학생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2학년 1반 국어 수업을 들어가 보니 자려야 잘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아이들 모두 수업 시간 내내 교실을 돌아다니거나 앞 뒷자리에 앉은 친구끼리 모여 앉아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쉬는 시간처럼 자유롭다가도 모둠별로 아이디어를 발표할 때는 반박에 재반박이 이어지며 토론 수업처럼 진행됐다. 이날 수업에서 학생들 의견이 가장 많이 엇갈린 부분은 5연에 대한 해석이었다.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 거울속에는늘거울속내가있소/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라는 부분이다.



시끌시끌한 모둠별 토의 뒤에 고병화군이 “‘거울 속의 나’는 내면적 자아를 상징한다”며 “시인이 지금 거울을 갖고 있지 않다고 표현한 걸 보니, 현재 처한 상황 때문에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다”는 해석을 발표했다. 그랬더니 이승호군은 “그건 표피적 해석”이라며 “시인은 지금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본질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자아 분열”이라고 했다. 또 “거울 속 자신이 사업에 골몰하는 진짜 자신이고, 현재의 자신은 껍데기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건 자신을 굉장히 혐오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모두들 상대 발표에 귀 기울이고 또 반박하느라 눈이 반짝반짝했다.



백영고 학생들 수업 태도가 다 이렇게 좋을까. 살짝 교실을 빠져나와 다른 교실 수업 모습도 살폈다. 그랬더니 다른 일반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맨 앞자리에서 아예 엎드려 자는 학생, 10여 명이 교실 뒤에 서서 수업을 들으면서도 연신 하품을 해대는 교실이 대다수였다.



김 교사가 만든 유인물. 수능 기출문제나 이론 관련 요약 정리 대신 학생의 생각과 느낌을 묻는 질문으로 채워져 있다
김 교사 수업은 뭐가 다른 걸까. 학생들 집중을 이끌어내는 정교한 전략이 세 가지 숨어 있었다.



첫 번째는 교재다. 김 교사는 교과서를 아예 활용하지 않는다. 대신 김 교사가 직접 만든 유인물을 교재로 쓴다. 보통 교사가 나눠주는 유인물에는 여러 문제집과 자습서에서 발췌한 작품 해석에, 수능 기출 문제나 내신 심화 문제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하지만 김 교사의 유인물에는 온통 ‘어떻게 느끼나’에 관한 질문뿐이다. ‘이 시의 의미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나에게 편지를 써보자’는 식이다. 딱히 정해진 답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유인물로 시 한 편 익히는 데 꼬박 2교시를 쓴다.



김 교사가 유인물을 직접 만들어 수업한 건 2004년 교사 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제는 10년 노하우가 쌓여 2시간이면 뚝딱 만든다. 김 교사는 “유인물을 만드는 시간보다 수업 후 학생에게 어떤 피드백을 줄 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다”고 말했다. “머릿속에선 24시간 내내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



보통의 국어 교사는 한 교시에 최소 시 다섯 편을 훑고 관련 문제 수십 개를 푼다. 그래서 김 교사 수업이 느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김 교사는 “학교 수업을 통해 수능에 나올 모든 문학 작품을 마스터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시험장에서 낯선 작품을 만났을 때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게 국어 수업 본연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다는 얘기다.



두 번째는 미디어 활용이다. 이상의 시를 배우면 이상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물론 일제강점기 관련 영상 등 작가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각 자료를 여러 편 보여준다. 시각적 자극에 민감한 요즘 학생들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또 “문학은 차가운 논리나 이성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오감을 통해 공감하는 것”이라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영상 자료가 효과적”이라고 했다.



마지막은 시험 문제다. 철저하게 수업에 근거해 출제한다. 수업 중 분석한 문학작품을 그대로 낸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생소한 작품을 제시하고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근거로 해석하게 한다. 김 교사는 “학원 강의를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학교 시험은 잘 볼 수 없다는 걸 학생들이 알기 때문에 수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근 학원가에서는 “백영고 국어 내신은 학원서 준비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자, 그렇다면 이런 방식의 수업으로 수능 점수를 올릴 수 있을까. 2학년 심유경양은 “1학년 때보다 확실히 감을 잡았다”며 “모의고사 성적도 올랐다”고 말했다. 심양은 “전에는 자습서의 작품 해설을 외우려고만 했지 스스로 감상하는 법을 몰랐다”며 “지금은 내가 스스로 읽고 느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2학년 이철민군도 “중학교 때는 국어에 자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가장 재미있는 과목”이라며 “지문을 해석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연구하다보니 모의고사 점수도 많이 올랐다”고 했다.





백영고 김태현 국어교사



1976년 출생

1995년 한양대 국어교육학과 입학

2004년 백영고에서 교사 시작

2008년 교사 모임 ‘행복한수업 만들기’ 부위원장

2012~13년 EBS 다큐 프라임 ‘선생님이 달라졌어요’ 수업코칭전문가로 출연

2013~現 교사 모임 ‘좋은교사 수업코칭연구소’ 부소장



교수법: 협동학습을 통해 다양한 문학작품을 해석하고 발표, 작품에 대한 이해력과 공감 능력을 키움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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