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명복 칼럼] 악마화의 위험

중앙일보 2014.09.16 00:01 종합 35면 지면보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과 주한 미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86)가 쓴 회고록을 읽었다. 지난 4월 뉴욕주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한 게 인연이 돼 회고록이 나오자마자 한 권을 보내왔다. CIA 요원과 외교관, 또 백악관 정책담당자로 40년 넘게 공직을 수행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개인적 에피소드 및 소회(所懷)와 잘 버무렸다. 수시로 빛을 발하는 그의 유머감각 덕분에 330쪽 분량의 책을 마치 소설책 보듯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레그는 국가를 위해 봉직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며 후세에 전하는 교훈을 회고록의 마지막 장에 담았다. ‘악마화의 위험(Dangers of Demonization)’이란 장이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내가 관찰하거나 직접 참여한 미 대외정책의 다양한 패턴들을 돌아볼 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가 싫어하거나 잘 모르는 외국 지도자나 단체를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고, 그때마다 미국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상대에 대한 무지(無知)의 간극을 편견으로 메우게 되면 선동이 분쟁을 촉발하고, 그 결과는 모두에게 손해라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CIA 요원으로 현지에서 활동했던 그는 미국이 베트남의 독립영웅인 호찌민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베트남전쟁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비극이었다고 주장한다. 호찌민은 미국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고, 특히 미 헌법을 제정한 토머스 제퍼슨의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호찌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 여러 차례 손을 내밀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베트남의 독립만 인정해 주면 미국과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친서까지 보냈지만 미국은 이를 묵살했다. 1972년 친서가 비밀해제될 때까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숨겼다.



 특히 베트남을 북한과 동일시한 것은 미국의 결정적 실수였다고 그레그는 회고한다. 두 나라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에 대해서는 전폭적 지지를 보낸 반면 호찌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호찌민의 유일한 목적은 독립과 통일이었는데도 미국은 베트남을 중국의 졸(卒)로 보고,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에 사로잡혀 안 해도 될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역사는 실패한 개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IA의 비밀공작을 통해 쿠데타를 사주(使嗾)하고, 반(反)정부 세력을 지원하거나 심지어 무력개입까지 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독재정권이 등장해 역효과를 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양이 자리에 호랑이를 앉힌 꼴이다. 뉴욕타임스 중남미 특파원 출신으로 미국의 대외 개입 역사를 심층 추적한 스티븐 킨저는 『하와이에서 이라크까지 미국의 체제전복 세기』(2006)란 책에서 세계 도처에서 시도된 미국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공작은 미국의 안보를 강화하기보다 되레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새로운 두통거리로 등장한 이슬람 수니파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도 따지고 보면 잘못된 무력개입의 부작용이다. 미국은 왜곡된 정보를 근거로 사담 후세인을 악마로 몰아 처단하고, 이라크 정권을 교체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IS의 발호를 부추긴 꼴이 됐다. 미국이 옹립한 시아파 총리 누리 알말리키의 전횡으로 코너에 몰린 알카에다의 한 분파가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의 지도 아래 IS로 발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임자인 조지 W 부시의 잘못된 이라크 개입이 후임자인 오바마에게 두고두고 짐이 되고 있다. IS 격퇴 범위를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확대하면서 막이 오른 오바마판 중동전쟁은 다시 그의 후임자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세습 왕조정권을 물려받아 문을 걸어잠근 채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인권을 탄압하고, 강제수용소를 운영하는 북한은 미국의 눈에 악마로 비치기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악마로 보이는 것과 실제로 악마인 것은 별개의 문제다. 상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악마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저지른 뼈아픈 실수를 되풀이할 수 있다.



 회고록에서 그레그는 “북한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보 실패 사례”라고 고백한다. 정보기관 차원의 실패일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지적인 사고의 실패라고 실토한다. 상대를 잘 모른다면 일단 접촉하고 대화해야 한다. 악마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에 판단할 문제다. 싫다고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은 미국이 자부하는 지성에 대한 모욕이고 배신이다. 북한에 억류돼 있는 3명의 미국인은 북·미가 만날 수 있는 좋은 구실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