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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예산폭탄은 선거판 구호일 뿐 … 잊어라

중앙일보 2014.09.15 00:48 종합 28면 지면보기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순천·곡성에 예산폭탄을 퍼붓겠다”는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의 7·30 재·보선 공약은 한국 정치사에 남을 히트작이다. 지역 장벽을 단숨에 허물었다. 폭탄은 이자폭탄, 세금폭탄처럼 주로 섬뜩한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폭탄이 예산과 어우러지면서 강렬하고, 매력적인 구호로 탈바꿈했다. 이 의원이 홍보수석 출신답게 조어(造語)를 잘했다.



 호남에서 ‘여당 뽑아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공약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이번엔 이 의원이 정권 실세여서 폭발력이 배가됐다. 순천·곡성 주민 입장에서 ‘대통령 측근의 예산폭탄’이라는 절묘한 조합을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야당 의원을 뽑아봐야 별다른 게 없었다는 학습효과도 작동했을 터다. 물론 자전거로 지역구를 누빈 이 의원의 진심이 통했을 테고.



 이 의원은 당선 후 예산폭탄이 허튼소리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새누리당도 보란 듯 그를 예결위에 배정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예산폭탄이 불발탄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마음 같아선 순천·곡성뿐 아니라 호남 전역에 시원하게 예산폭탄을 터뜨렸으면 한다. 덕분에 지역을 발전시키고, 지역 갈등도 해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다. 나라 살림이 넉넉지 않다. 경기침체로 지난해 세수(稅收)가 9조원(국세 기준) 부족했다. 올해는 사정이 더 안 좋다. 기업들의 이익이 줄면서 법인세가 감소했다. 소비가 부진해 부가가치세 징수도 시원치 않다. 상반기 재정적자가 24조원을 넘었다. 정부가 욕을 먹으면서 담뱃세·주민세 등 이런저런 증세를 추진하지만, 이 정도로 수습될 것 같지 않다.



 재정을 투입해야 할 곳이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화로 복지 지출이 만만치 않고, 세월호 참사 여파로 안전 예산을 대폭 증액해야 한다. 쌀시장 개방과 관련해 농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소홀할 수 없다. 돈이 마른 지자체마다 손을 벌린다. 게다가 내년에는 경기부양 관련 사업에 예산을 집중 배정해야 한다. 눈 딱 감고, 특정 지역을 봐줄 여력이 없는 것이다.



 예산폭탄이 또 다른 지역 갈등을 부를 위험도 있다. 호남의 다른 지역에서 순천·곡성을 지켜보고 있다. 정권 실세가 있는 곳만 예산폭탄을 터뜨리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호남 곳곳에 예산폭탄을 터뜨릴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 충청·영남 등 다른 권역도 예민하긴 마찬가지다. 다들 자기 지역이 호남 못지않게 낙후돼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1인당 지역총소득(2012년)을 보면 16개 시·도 가운데 전북이 꼴찌다. 대구(15위)·강원(14위)·광주(13위)·제주(12위)가 하위권이다. 순천·곡성이 속한 전남은 상위권인 4위다. 통념과는 다른 결과이지만, 적어도 통계상 가장 낙후된 곳은 전남이 아니다.



 예산폭탄을 실현하려면 누가 봐도 수긍할 만한 사업을 제시해야 한다. 이 의원의 대표 공약은 순천대 의대 유치다. 4000억원이 필요한 사업이다. 지난달 새누리당 최고위원들이 순천대에서 의대 유치 방안을 들었다. 이 의원은 정권 실세답게 “의대를 정상적으로 추진하되 어려우면 정치적으로, 그것도 안되면 정책으로 밀어붙이겠다”고 호언했다.



 정작 순천대 관계자들은 의대 설립의 당위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김무성 대표는 “원론적인 말만 듣고 나니 실망스럽다. 의대가 꼭 필요한 논리를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빠듯한 나라 살림에서 4000억원을 뚝 떼낼 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4000억원은 큰돈이다. 일례로 주민세를 두 배로 올려봐야 3000억원 남짓 더 걷힌다.



 예산은 제로섬(zero-sum)이다. 누군가 더 받으면 다른 쪽에선 덜 받는다. 다들 더 받고 싶으면 정부가 빚을 내야 한다. 아니면 교묘한 방법으로 봉급생활자 호주머니를 쥐어짜든지. 다시 예산철이다. 정부는 가을 정기국회에 제출할 내년 예산안을 조만간 확정한다. 돈은 부족하고, 쓸 곳은 많다. 늘 그랬지만 올해는 여건이 특히 안 좋다. 경중과 선후를 가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예산안을 짜기 바란다. 정부도, 국회도, 예산폭탄은 깨끗이 잊어라.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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