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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은 작은 유엔 … 아시아 출신이라는 게 내 장점”

중앙선데이 2014.09.14 00:47 392호 12면 지면보기
CNN 인터내셔널
수퍼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을 강타한 지난해 11월 8일. 폐허로 변한 도시와 참혹한 이재민 모습을 전 세계에 가장 먼저 생생히 알린 건 CNN이었다. 태풍 상륙 24시간 전 CNN 취재팀이 미리 필리핀 타클로반시에 도착했기에 가능한 보도였다. 취재팀 파견 결정을 내린 건 한국계인 엘레나 리(43) CNN 아시아·태평양본부 총괄본부장이었다.

CNN 인터내셔널 수석부사장에 오른 한국계 엘레나 리

“실제 태풍이 닥치기 전까진 피해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보통 언론은 이미 재난이 닥친 뒤 현장에 가죠. 우린 과거 경험과 데이터를 갖고 판단을 내렸어요. 결국 하이옌이 사상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됐으니 그 판단이 옳았죠.”

CNN 아·태본부는 이 보도로 영국 왕립텔레비전협회 ‘올해의 뉴스 채널’ 등 여러 상을 받았다.

1997년 CNN 뉴욕지부로 입사한 뒤 초고속 승진을 기록해 온 엘레나 리 본부장은 최근 그 역할이 더 커졌다. 지난 10일 CNN 인터내셔널 수석부사장으로 한 계단 승진했다. 전 세계 200여 개국, 3억8000만 가구를 시청자로 둔 CNN 인터내셔널의 해외본부(미국 제외)에선 최고위직이다. 아시아계가 이 직책에 오른 건 CNN 사상 처음이다.

일본 출장 중인 엘레나 리와 12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하다는 그는 짧게 답할 땐 한국어, 길어지면 영어를 썼다.

-이번 승진으로 아·태 지역 본부뿐 아니라 CNN 인터내셔널의 특집프로그램 편성까지 맡게 됐다.
“그렇다. 국제 업무를 새로 맡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난 아·태본부가 있는 홍콩에서 일한다. 국제업무를 맡으려면 미국 애틀랜타 본사나 영국 런던 본부에서 일해야 했던 관행이 처음 깨졌다. CNN이 아시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변화다. 아시아는 이슈와 기회가 넘치는 곳이다. 뉴스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아시아에서 일하는 건 흥미진진한 일이다.”

-CNN 하면 발 빠른 재난현장 보도가 떠오른다. 최근 아시아에선 유독 큰 재난이 많았다.
“지난 12개월은 정말 일이 많았다. 필리핀 태풍에 이어 말레이시아 여객기 실종사고, 세월호 참사까지. 하이옌 태풍 때 CNN은 한발 앞서 취재팀을 보냈고, 미스터리했던 말레이시아 여객기 사고 땐 다양한 각도에서 이를 조명하는 심층 보도를 했다. 지난 1년은 무척 바빴지만 가장 보람찬 시기였다.”

해외본부 최고위직 오른 첫 아시아인
-재난보도를 할 때 원칙이 있다면.
“우리 원칙은 단순하다. 편견 없이 보도할 것. CNN은 우리가 본 것을 시청자에게 전달한다. 또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최대한 경의를 표한다. 세월호 참사를 보도할 때도 이 보도 원칙은 적용됐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출신으로서 특히 가슴 아팠다. CNN은 세월호와 관련해 많은 가슴 아픈 사연을 보도했는데, 무엇보다 가장 슬펐던 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참사였다는 점이다.”

엘레나 리는 뉴욕대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CNN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첫 인연을 맺었다. 대학원 졸업 뒤인 97년 뉴욕지부에 프로듀서(PD)로 입사해 ‘인 더 머니(In the Money)’ 프로그램 론칭을 맡았다. 2001년 CNN 인터내셔널 아·태본부로 자리를 옮겨 ‘아이 온 차이나(Eye on China)’ 같은 기획프로그램을 제작하며 입지를 굳혔다.

-입사 때부터 CNN에서 성공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나.
“처음엔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3~4년 다니다 옮길 생각이었다. CNN 뉴욕지부에서 일한 지 4년째 되던 2000년 말, 일에 지쳐서 떠나겠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그때 상사가 ‘그럼 CNN 인터내셔널 홍콩 본부는 어떠냐’고 제안했다. 홍콩에서 2~3년만 있어볼까 하고 온 게 벌써 14년째다. 편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이다. 용기 내서 마음 가는 대로 하길 잘했다. 성공은 높은 자리를 좇는다고 되는 게 아닌 듯하다. 다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긍정적인 생각이 성공 비결이라는 건가.
“솔직히 CNN 정도 되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들 똑똑하다. 이런 조직에서 성공하는 사람의 가장 큰 차별점은 생각이 긍정적이라는 거다. 사실 CNN 일은 힘들고 고되다. 재난 현장에 직접 가야 하고, 공항에서 텐트 치고 노숙하는 경우도 많다. 사명감과 긍정적 사고가 없으면 못 견딘다.

‘여성이라서’ 생각해본 적 없어
-CNN은 성별이나 인종에 따른 차별은 없나 보다.
“전혀 없다. 여성이라서 안 된다, 또는 된다는 식의 생각을 아예 해본 적 없다. 여성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시리아 취재현장을 누비고 있다. 아시아인이라는 건 글로벌 미디어 그룹에서 일하는 데 있어 장점이다. CNN은 ‘작은 국제연합(유엔)’이다. 다양성은 CNN의 중요한 자산이다. 특히 국제사회에서 아시아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한국적 정서는 내가 일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자 엘레나 리는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외국인학교에 다녔고, 고교 졸업 뒤 미국으로 가 조지타운대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고, 미국식 교육을 받았다. 그래도 한국적 정서가 있나.
“내 머리는 미국인이지만, 감성은 한국인이다. 정이 많고 감정이 풍부하다. 사람들과 친하게 잘 지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한국적 정서가 내가 일하는 데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한국 기업이나, 전 세계로 퍼진 한류 붐을 보면 자랑스럽다. 요즘엔 어딜 가든 한류에 대해 얘기한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아이스 브레이커(ice breaker)다.”

-항상 바쁠 듯하다. 혹시 일 중독자는 아닌지.
“그렇진 않다. PD는 수많은 뉴스거리 중 중요한 것만 추려내는 직업이다. 무얼 버릴지 결정하는 걸 훈련해왔다. 일과 생활의 균형도 마찬가지다. 일만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다. 요령 있게 해야 한다. 요즘도 주말엔 친구들과 2시간씩 걷기운동을 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난 이제 막 한 발 내디뎠다. 지금은 더 무거워진 내 책임을 다하는 데 우선 집중하겠다.”
인터뷰 막바지, 슬쩍 결혼 계획을 물었다. 그는 “어휴, 한국에선 꼭 나이나 결혼에 대해 묻더라”며 웃었다. “난 결혼을 계획해서 하고 말고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내 짝이 짠하고 나타난다면 당연히 (결혼을) 하죠.”



엘레나 리 1997년 뉴욕대에서 저널리즘 석사 과정을 마친 뒤 CNN 뉴욕지부에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 산하 스텝(STEP)재단의 도영심 이사장이 어머니다. 남동생은 이재영 국회의원(새누리당)이다. 2007년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젊은 글로벌 리더 200인’에 이름을 올렸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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