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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예수의 길, 이순신의 길

중앙선데이 2014.09.14 03:01 392호 27면 지면보기
영화 ‘명량’의 흥행 행진 소식을 뉴스로 접할 때마다 괜한 자긍심에 소년처럼 으쓱해지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 장군이 억지로 따져 보면 나의 까마득한 대선배이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든 나는 해군 학사장교로 군복무를 했던 인연에 기대어 그를 귀하디 귀한 인맥(?)으로 여긴다. 나는 해군 가족이 된 것을 행운으로 여겨왔다. 그 결정적 까닭은 100일의 훈련 기간 중 ‘좌학(교실학습)’ 시간에 다른 곳에서 따로 공부하기 힘든 이순신학을 배우는 특권을 누렸던 데 있다. 나는 이순신 고유의 위대함으로 그의 백의종군(白衣從軍) 정신을 꼽는다.

백의종군! 글자 그대로 군복이 아닌 평인의 복장으로 군인의 사명에 종사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다. 알다시피 이는 정유재란 발발 당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원균의 간언으로 임금의 미움을 사 삭탈관직 당했을 때 그가 택했던 길이었다. 인간적인 원한과 굴욕, 그리고 임금에 대한 원망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몰아적(沒我的) 사랑 앞에선 무력할 따름이었던 것이다. 감투에 연연하지 않고 누가 알아주든 말든 오직 멸사봉공의 혼으로 애국애족의 끝을 보여준 이순신. 그는 청년 시절 내 마음과 영혼을 흔들었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어느덧 ‘백의종군’이란 단어는 내 입버릇이 됐다. 듣는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젊은 연구원들로부터는 구박까지 받았다. “아, 그 고리타분한 얘기 좀 그만하세요. 어떤 시대인데 ‘애국’이니 ‘충성’이니 하는 케케묵은 발상이세요. 이제 식상하다구요. 이순신은 만들어진 영웅 아니에요?” “이런, 너희들이 이순신을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이냐?”

그분 이름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들었기에 잘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우리는 사실 그분을 제대로 모른다. 그를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 덕에 제법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오늘 우리에게 낯선 타인이다. 나는 이순신의 진면목을 가장 잘 그려낸 글로 다음을 꼽고 싶다. “세계의 전쟁 영웅은 피로 만들어진다. 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보게끔 만든다. 알렉산더 대왕도, 카이사르도, 칭기즈칸도, 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을 볼 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십자가를 선택했다. 그를 영웅 이순신이라 하지 않고 성웅 이순신이라고 하지 않은가. 우리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만드는’ 영웅이 아니라 우리를 ‘고개 숙이게’ 하고 ‘부끄럽게’ 하는 성웅! 그의 백의종군 행보는 적어도 내게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길에 버금간다. 그러기에 본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사족이지만 그게 그리 녹록지 않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일까. 무슨 직분을 맡아달라는 촉탁 청원이 곧잘 들어온다. 대체로 선의의 뜻에 공감은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름만 올리고 마음으로 함께 해달라는 일보 후퇴 설득에 부득불 승낙해 놓고는 이름값도 못해 죄스러움을 느끼는 경우도 없지 않다. 아무래도 백의종군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그럼에도 백의종군은 여전히 나의 노래다. 말뿐이라도 이 자구가 젊은이들 사이에 번졌으면 좋겠다. 생색내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공익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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