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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고대사] 진성여왕 등극 후 군웅 할거 … 다시 쪼개지는 통일신라

중앙선데이 2014.09.14 03:10 392호 28면 지면보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935년 10월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 그로 인해 많은 신라인들이 고려의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고려에 항복한 경순왕은 978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경순왕릉(사적 제244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사진가 권태균]
삼한통합으로 한때 태평성대를 누렸던 신라는 8세기 말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822년 ‘김헌창의 난’ 이후에는 피비린내 나는 왕위계승전이 이어져 하루도 바람잘 날이 없었다. 멸망의 징조는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다.

<20·끝> 대신라의 멸망

제49대 헌강왕 6년(880) 9월 9일 왕은 측근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민가는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피리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왕은 시중 민공(敏恭)에게 “내가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집을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 데 정말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은 “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 음양이 잘 조화를 이루어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합니다. 변경지방은 조용하고 평온합니다.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이것은 모두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이는 그대들이 나를 잘 도와준 힘이지 내가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며 즐거워 했다. 헌강왕과 시중 민공의 대화는 신라의 평화와 번영을 증명하는 근거로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었다. 『삼국유사』 2, 『처용랑 망해사』 조에 나오는 대목이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하니 남산신이, 금강령에 행차하니 북악신이, 동례전에서 잔치를 할 때는 지신(地神)이 춤을 추었다. 『어법집』에는 그 때 산신이 춤을 추며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했다.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사태를 미리 알고 도망했으므로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다. 지신과 산신이 나라의 멸망을 춤으로 경고한 것인데 국민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났다하여 술과 탐락(耽樂)함이 심했던 까닭에 나라가 마침내 망했다고 한다.

중앙 지배 벗어난 군웅들 ‘영토’ 확장
헌강왕의 동생인 제50대 정강왕(886~887)을 거쳐 여동생인 제51대 진성여왕(887~897) 때에 신라는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889년에는 나라 안의 여러 주·군에서 공물과 부세(賦稅)를 바치지 않아 국가의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독촉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도적이 봉기했다.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영기를 보내 잡게 했으나 성루를 바라보고 진격하지 못했다. 그 때 그 지역에 토착해 살던 촌주(村主) 우련이 힘껏 싸우다 죽었다(『삼국사기』 11, 진성왕 3년).

이 무렵 지방에는 많은 군웅(群雄)들이 등장했다. 891년 북원의 양길과 그를 보좌하는 궁예(弓裔), 892년 완산주의 견훤(甄萱) 등이 부상했다. 896년에는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赤袴賊)들이 여러 주·현의 군대를 물리치고 서울 서쪽 모량리까지 쳐들어와 민가의 재물을 빼앗아갔다. 897년에는 백성들이 곤궁하여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이는 자신이 덕이 없기 때문이라 하고 왕위를 물려주는 일이 벌어졌다(『삼국사기』 11, 진성왕 11년).

이렇게 지방의 여러 주·군·현에 도둑(실제는 신라왕의 지배를 벗어난 군웅)들이 등장했는데 조정에서는 이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처음에 지방의 군웅들은 촌(직경 10여 ㎞ 정도 영역)이나 주·군·현의 직할지(직경 30~40㎞ 정도 영역) 안의 성에 웅거하고 그 지역을 지배하는 정도였다. 지방의 군웅들은 나름대로 정부조직을 만들어 운용하였다.

그런데 891년 10월 북원의 양길이 궁예를 보내 북원의 동쪽부락과 명주(溟州) 관내 주천 등 10여 군·현을 습격했다. 그리고 892년에는 견훤이 완산주에 웅거하여 후백제를 칭했는데, 무주(武州)의 동남쪽 군·현이 항복하여 예속했다. 효공왕 2년(898) 7월에는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아 드디어 송악군에 도읍을 정했다. 899년에는 양길이 궁예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품은 것을 미워하여 국원 등 10여 성의 성주와 함께 궁예를 치려고 진격했으나 양길의 군대가 달아났다. 900년에는 국원·청주·괴양의 군웅들이 궁예에게 항복했다. 대군웅들이 등장한 것이다. 강주의 왕봉규, 명주의 김순식, 죽주의 기훤 등도 대군웅들이다. 이들은 일정 지역의 군웅들을 일종의 제후적인 존재로 거느렸다.

경애왕 4년(927) 9월 견훤이 고울부(현재 영천)에 쳐들어 오자 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포석정(사적 제1호, 경주시 배동)이 포함된 포석사(鮑石祠)에는 삼한통합을 가능케 했던 ‘사기의 종주(宗主)’인 문노의 화상이 있다. 927년 11월 경애왕이 포석사에 가서 나라를 구해달라고 기원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말 지방 이주 세력들 상당수 ‘봉기’
대군웅 중 견훤과 궁예는 특별했다. 왕을 칭한 것이다. 견훤은 앞서 후백제를 세웠을 때 왕을 칭하지 못하고 ‘신라서면 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안남군 개국공’이라 했다. 그런데 900년에 견훤은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 의자왕의 오래된 원한을 풀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후백제 왕이라 자칭하고 관부와 관직을 설치했다. 그 해 8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대야성을 쳤으나 항복하지 않아, 금성의 남쪽으로 군사를 옮기고 연변 부락을 약탈해 갔다.

궁예는 901년 왕을 칭했다. 904년에는 백관을 설치했는데,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 나라이름을 마진, 연호를 무태라 했다. 패강도의 10여 군현이 궁예에게 항복했다. 905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같은 해 8월 궁예가 신라 변읍(邊邑)을 빼앗아가고 죽령 동북쪽에 이르렀다. 왕은 영토가 날로 줄어드는 것을 걱정했으나 막을 수가 없어 성주들에게 명을 내려 성벽을 굳게 지키라 했다.

후백제와 마진(태봉)이 들어선 후 대신라의 영역은 군웅, 대군웅 그리고 후백제와 태봉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전국시대가 됐다.

918년 왕건이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후에는 후백제와 고려를 축으로 하는 패권쟁탈전이 벌어졌다. 927년 견훤은 신라 왕경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가기도 했다.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을 했다. 이듬해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대신라에 뒤이어 새로운 왕국이 들어서게 됐다.

9세기 후반 등장한 군웅들은 누구였나. 이를 밝히는 일은 한국인의 오리진을 찾는 작업이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918년 8월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포상을 시행한 일이 있다.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을 1등으로 삼고, 견권 등 7인을 2등으로 삼아 포상하고 제3등인 2000여 명에게도 비단과 곡식을 차등 있게 주었다(『고려사』 태조 원년(918) 8월). 이때 포상 받은 사람들은 고려의 태조 개국공신들이다. 이들 개국공신과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는 데 공을 세운 삼한공신은 진성여왕 이래 성장했던 지방의 군웅들이 많이 포함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군웅들 중에는 왕경인으로 신라 말에 지방으로 이주한 세력들이 다수 있었다고 본다.

그 예들이 있다(김용선 편저, 『고려묘지명집성』, 2001). 고려 『김의원 묘지명』(1153년 작성)에는 “공의 이름은 의원이고, 나주 광양현 사람이다. 그 선조는 본래 신라에서 나왔는데, (신라)말 난을 피했다가 이로 말미암아 (그곳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고려 『박경산 묘지명』(1158년 작성)에는 “박씨(朴氏)의 선조는 계림(鷄林·신라) 사람으로, 대개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예이다. 신라 말에 그 후손인 찰산후 적고의 아들 직윤 대모달이 평주로 이주하여 관내 팔심호의 읍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직윤 이하의 후손은 평주 사람이 되었다.” 직윤의 아들·손자·증손자가 모두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다고 나온다. 이제현(李齊賢) 묘지명(1376년 작성)에는 그의 성이 이씨로 시조가 혁거세 때의 좌명대신 이알평이라고 한다. 그의 조상 중에 고려 초의 삼한공신 금서(金書)가 있었다고 나온다. 태조 개국공신과 삼한공신들이 중앙과 지방에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던 사정을 알 수 있다.

신라의 DNA, 한국·한국인에게 이어져
935년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자 왕건은 맏딸을 경순왕에게 주어 사위로 삼았다. 왕건은 경순왕의 큰 아버지 억렴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으니 이가 훗날 현종의 아버지가 되었다. 왕건은 918년 6월 왕위에 오르며 궁예가 만든 품계와 관직, 그리고 군읍의 이름을 신라의 제도로 돌렸다. 고려 조정의 신료나 지방의 지배세력인 향리들도 신라인의 후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고 본다. 신라 지배세력들이 없었다면 고려 통치조직을 운영할 인적 자원을 채울 수 없었다. 『박경산 묘지명』의 내용도 그 중 한 예다. 고려 향리의 적지 않은 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태조 개국공신(918년 고려건국)과 삼한공신(고려의 전국통일)의 후손들로 지방의 군현을 본향(本鄕)으로 삼아 가문을 번성케 하였다.

왕건과 이성계의 두 차례 역성혁명은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를 정복한 것과는 달랐다. 종성과 육부성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신라인들이 고려의 향리층이 되었고, 고려의 향리층은 조선의 양반층으로 되었다. 많은 면에서 신라·신라인이라는 역사적 유산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 한국·한국인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교수·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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